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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57_세계 2위의 경제 대국, 그 거품이 터지다 세계 제2위의 경제 대국이 되다 이케다 내각이 집권하던 1963년, 일본의 GDP는 676억 달러로 같은 시기 미국의 11.4퍼센트, 서독의 70퍼센트, 영국의 78퍼센트에 달했으며, 1966년까지 실질적인 경제 성장률이 13퍼센트를 기록해 일본은 전체 GNP 규모가 미국과 독일, 영국, 프랑스에 이어 세계 5위를 차지했다. 메이지 유신을 실시한 지 100년째 되던 1968년, 일본의 GNP가 서독을 앞질러 1위인 미국의 바로 뒤를 잇는 2위로 올라섰다. 당시 일본의 국민 소득은 여전히 세계 20위에 머물러 일본인들의 생활이 '세계 제2위 경제 대국'의 국민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였지만, 주요 산업의 국제 경쟁력은 매우 강했다. 일본 경제는 국민 경제의 활력과 고성장률, 낮은 실업률, 안정된 물가를 무기.. 2024. 1. 29.
[일본 근현대사]#56_1950-60년대 도쿄 올림픽, 베트남 전쟁 특수를 맞이하다 도로 건설 분야에서는 나고야-고베 간 고속도로가 전면 개통되었고, 승객 및 화물 육상 운송이 빠르게 보급되었다. 항공 분야에서도 지방 항로가 개설되었으며 해외 항로 역시 점점 증가해 미국과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국내선과 국제선에 제트기화가 실현되었다. 일본의 산업 구조에도 중대한 변화가 나타났다. 중화학 공업의 국제 경쟁력은 시간이 갈수록 향상되었다. 일본의 철강 생산량이 서독을 초월해 세계 3위로 올라섰으며, 자동차 생산량도 미국, 영국, 서독의 뒤를 이어 세계 4위까지 올라갔다. 1963년 중화학 공업이 공업 고정자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60퍼센트에 달했고, 수출 비율은 1965년에 62퍼센트까지 증가했다. 세계 선진 수준의 최신 설비를 도입한 후 일본은 경제 고속 성장에 부응할 수 있는 중화학 공.. 2024. 1. 28.
[일본 근현대사]#55_국민 소득 배증 계획, 신칸센의 등장과 소비 인식 향상 국민 소득 배증 계획 1950년대 말, 도쿄의 한 식당에서 이케다 하야토와 몇몇 학자들이 정기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은 이케다 하야토의 싱크탱크인 '고치카이'의 주 1회 정기모임이었다. 이케다 하야토는 일본 경제 정책을 주도해 온 주요 경제 관료로 요시다 시게루 내각에서 대장성을 주관하며 통산상과 경제심의청 장관을 역임했다. 바로 이때, 젊은 경제 전문가인 시모무라 오사무의 주장이 이케다 하야토의 관심을 끈 것이다. 1950년대 중반, 아직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시모무라 오사무는 일본 경제의 두 자릿수 성장을 예측했다. 이케다의 경제 자문인 다무라 빈고는 그를 이케다에게 추천했다. 그러나 공식적인 정부 계획안에 명시할 숫자를 둘러싸고 시모무라와 다무라 사이에 한바탕 설전이 벌어졌다. 시모무라는 11퍼.. 2024. 1. 27.
[일본 근현대사]#54_한국전쟁과 샌프란시스코 조약 자동차 공업도 정부의 특별 지원 대상 산업이었다. 1949년, 미국이 일본을 점령하고 자동차 생산 대수 제한 조치를 폐지했다. 당시 일본의 자동차 생산량은 연간 3만 대에도 못 미쳤다. 그러나 그 후 닛산, 이스즈, 도요타, 히노 등 자동차 생산업체들이 거액을 투자해 외국의 선진기술을 도입해 향후 자동차 제조업의 현대화에 기초를 다진다. 1호기는 수입하고, 2호기 국산으로 일본의 합리화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기술 도입 방식이다. 일본은 거의 모든 기계 공업에 훗날 '1호기 수입, 2호기 국산'이라고 불린 방식이 적용되었다. 일본은 이 방식을 통해 국제적인 선진 기술을 최단 시간에 도입하고 개선해 외국 제품과 대등한 수준의 제품을 국내에서 생산해 국제시장의 문을 두드렸다. 특히 자동차와 전자산업의 성.. 2024. 1.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