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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49_두 개의 원자폭탄과 일본의 무조건 항복 1943년부터 일본은 일본 본도에서 쿠릴 열도, 오가사와라 제도, 이오지마, 마리아나 군도, 필리핀 군도,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 및 인도양의 안다만 제도로 이어지는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 방어선의 바깥쪽에는 라바울, 솔로몬 섬 중부, 뉴기니섬 중부와 마셜 제도가 있었다. 미국의 진격, 밀리는 일본 일본은 중국군과 관동군, 조선군을 신속하게 태평양으로 파견했지만, 미국의 빠른 공격과 압도적인 자원 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12월 말, 일본 해군은 솔로몬 군도에서 철수하였으며, 뉴기니에 있던 13만 일본군이 고립되었다. 일본은 마리아나 군도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1944년 6월, 미군의 대형 함대가 사이판으로 접근해 마리아나 군도에 있는 주요 일본 기지를 공격하기 시작하자, 일본은 항공모함 9척과 .. 2024. 1. 23.
[일본 근현대사]#48_일본의 진주만 공습과 태평양전쟁 일본은 대동아 공영권에 기반한 기본 국책 강요를 제정하면서 프랑스 정부와도 협정을 맺었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베트남 북부로 진격하고서, 독일, 이탈리아와 3국 동맹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세계를 분할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2차 세계대전의 추축국, 3국 동맹을 맺다. 이 조약을 통해 일본은 유럽의 새로운 질서에서 독일과 이탈리아가 갖는 주도적 지위를 인정했고, 독일과 이탈리아는 대동아의 새로운 질서 구축에 있어서 일본의 주도적인 지위를 인정하기로 했다. 이 조약은 3국과 소련의 정치적 관계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지만, 중일전쟁과 유럽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제3 국'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경우 모든 수단을 동원해 지원할 것을 약속했다. 이 조항은 바다 건너에서 고립주의를 유지하고.. 2024. 1. 22.
[일본 근현대사]#47_난징 대학살과 태평양전쟁 발발 1937년, 표면적으로는 중·일 관계가 매우 평온한 것처럼 보였지만, 4월부터 일본군이 핑진(현재 베이징과 톈진) 근교에서 군사훈련을 시작하였으며, 6월에는 펑타이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내부에서 군대의 이동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었다. 난징 대학살, 일본 군국주의의 광기 일본 도쿄 정치계의 소식통 사이에서는 칠석날 밤에 화베이에서 9.18 만주사변과 같은 사건이 재연될 것이라는 풍문이 떠돌았다. 같은 해 7월 초, 일본 천황 히로히토와 육군대신 스기야마 하지메가 중일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천황이 소련 군대가 걱정이라고 말하자, 스기야마 하지메는 "중국과 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2~3개월이면 해결될 것입니다."라고 호언장담했다.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부근에서 일본군과 중국군이 충돌한 .. 2024. 1. 22.
[일본 근현대사]#46_일본의 만주사변과 중국의 국공합작 1931년 9월 18일, 중국 선양 북부 류탸오거우에서 관동군 독립수비대의 고모토 스에모리 중위가 사병 6명을 데리고 남만 철도 선로 위에 황색 폭약 42포를 설치했다. 얼마 후 굉음과 함께 철로가 폭파되었다. 이 일은 중국 군대를 모함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었다. 9.18 만주사변 얼마 후, 4킬로미터 밖에 매복해 있던 카와시마 타다시 대위가 중국 군대에 공격을 퍼부었다. 이는 일본군이 이미 오랫동안 준비해 온 대규모 행동으로, 중국 동북부를 점령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9월 19일, 안둥, 잉커우, 창춘, 펑황청이 일본군에게 점령당했다. 장제스의 훈령에 따라 장쉐량은 저항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관리들은 자기들 목숨 부지하는 게 최우선이어서 도망가기 바빴다. 불과 4개월 동안 일본은 산해관.. 2024. 1.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