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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53_한국전쟁 특수로 인한 일본 경제의 도약 일본, 한국전쟁 특수를 톡톡히 누리다 1952년, 일본의 외환 보유고는 3년 전에 비해 5배나 증가했으며, 특수로 인한 수입이 수출로 벌어들인 전체 외화 가운데 63퍼센트를 차지했다. 당시 일본에 '실 사(絲)' 변과 '쇠 금(金)' 변이 이름에 들어간 업종은 무조건 성공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떠돌 정도로 섬유 방직 산업과 금속 산업의 수주량은 전쟁 이전보다 평균 4~5배나 증가했다. 2년 후, 특수 경제에 힘입어 일본의 주요 경제 지표가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수준까지 회복되었으며, 이는 전후 경제 회복이 거의 끝나감을 의미한다. 한국전쟁 특수로 인한 소비와 투자 붐은 2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미국 원조와 한국전쟁으로 인한 특수 경제만으론 완전한 경제적 자립을 실현하기에는 여전히 무리인 상황이었다. 1.. 2024. 1. 26.
[일본 근현대사]#52_패전 후, 일본은 어떻게 경제를 회복하였는가? 일본의 전후 개혁은 자산 계급의 정치와 경제 체제를 새롭게 수립했고, 현대적인 변혁의 시발점이 되었다. 일본 경제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신속하게 발전해 세계 경제 대국으로 부상하는 데 성공했다. 빠르게 회복한 일본 경제 1946년 12월 10일, 도쿄 대학 교수이자 요시다 시게루 내각의 석탄 위원회 위원장인 아리사와 히로미는 '일본 경제의 패국을 살리는 길'이라는 글에서 "기초 원료인 석탄 생산에 모든 경제 정책을 집중해야 한다. 이를 지렛대로 삼아 생활 수준을 향상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라고 했다. 당시 일본이 전후에 직면한 위기는 경제 붕괴였다. 실업자가 전체 노동 인구의 20퍼센트인 600만 명에 달했다. 식량 부족으로 굶어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심지어는 당시 일본 대기업 경.. 2024. 1. 25.
[일본 근현대사]#51_종전 후 미국의 일본 경제, 교육, 헌법에 대한 개입 신헌법에 의해 의회와 내각 그리고 지방 자치 제도에 대한 개혁도 기본적으로 이루어졌다. 재벌들은 해산하라, 미국의 경제 개입 경제 분야에서는 일본 군국주의를 지탱하던 주요 기반으로서 기생하던 지주 토지 소유제를 개혁해 경작자가 토지를 소유하는 자경농 제도로 변모했다. 연합군 총사령부는 일본 군국주의의 대외 확장에 경제적 기반을 제공했던 재벌을 해산시켰다. 당시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 야쓰다 등 10대 재벌이 소유한 기업의 총자산은 전체 기업 총자산의 35퍼센트, 금융자산의 53퍼센트, 중화학 공업의 49퍼센트를 차지했는데, 미국은 조사 보고서를 통해 "일본에서 재벌이 계속 존재한다면 이 나라는 곧 재벌의 나라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 미국은 지주 회사를 해산시키고, 재벌 가족의 통치권을 취소한다... 2024. 1. 24.
[일본 근현대사]#50_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 전후처리 1945년 8월 30일, 연합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가 일본에 도착했다. 그는 향후 5년간 일본에서 '태상황'의 지위를 누린다. 미국의 일본 점령 9월 2일, 도쿄만에 정박 중이던 미국 전함 미주리호에서 항복 조인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미국, 영국, 중국, 소련, 네덜란드 등 각국 대표가 지켜보는 가운데, 일본 시게미쓰 마모루 외상과 우메즈 요시지로 참모총장이 정식으로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맥아더는 황궁을 내려다볼 수 있는 도쿄의 중심 다이이치 생명 빌딩에 사령부를 설치했다. 9월 27일, 일본 히로히토 천황이 맥아더를 방문했다. 천황이 미국 대사관에 도착했을 때, 미국 사진기자가 히로히토와 맥아더가 나란히 서 있는 장면을 사진 찍었다. 이 사진이 일본 신문에 실린 후 일본이 발칵 뒤집혔다. 일본 .. 2024. 1.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