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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22_메이지 유신 초기, 면직물과 통신 분야 생사(삶아서 익히지 않은 명주실)는 일본의 주요 수출 품목으로, 오랫동안 총수출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효자 상품이었다. 당시 들여올 게 많았던 일본은 외국과의 무역에서 만성 적자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생사가 외화 수입을 벌어다 주는 몇 안 되는 품목이었다. 메이지 유신 초기, 면직물 산업 그러나 메이지 초기에 기술이 낙후되고 런던에서 막대한 양의 일본 생사가 조악한 품질로 인해 폐기되는 사건이 일어난 후, 일본 생사의 명성은 급격히 하락했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프랑스인들을 초빙해 관영 생사 공장을 건설하고 프랑스로부터 기계와 증기선을 도입했다. 이 공장이 건설되자 정부는 전국에 있는 사족의 아내와 딸들에게 모두 이 공장으로 와서 기술을 배우도록 하여 신기술을 전국적으로 보급하는 데 힘썼다... 2024. 1. 1.
[일본 근현대사]#21_메이지 유신, 식산흥업 정책을 실시하다 1872년, 도쿄에서 요코하마에 이르는 일본 최초의 철도가 개통했다. 많은 일본인이 개통기념식을 구경하기 위해 도쿄 신바시에 몰려왔다. 1874년에는 오사카-고베 철도가 건설되었고, 1877년에는 교토-오사카 철도가 개통되었다. 도쿄-요코하마 철도는 정부가 런던에서 100만 파운드의 공채를 발행해 건설한 것이었다. 일본 철도 산업의 발전 메이지 초기에 철도 건설을 지휘했던 이노우에 마사루는 훗날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메이지 초기에는 서양식 건축을 공부한 사람이 없었다. 철도 건설을 시작했을 때, 측량과 설계, 시공 및 기차 운전은 모두 외국인이 담당했다. 기수라고 불리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일본인이 외국 기술자를 따라다니며 일본인 노동자들과의 통역을 도맡아 했다. 당시 일본인 노동자들은.. 2023. 12. 30.
[일본 근현대사]#20_메이지 유신, 토지세를 개편하다 일본의 산업화는 부족했던 인프라 확충을 바탕으로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다. 이와쿠라 사절단이 일본으로 돌아온 후, 식산흥업은 정부의 당면 과제가 되었다. 오쿠보 도시미치 정권은 서구 열강들처럼 산업화에 온 힘을 쏟아붓기로 결정하고 과감한 개혁 정책을 단행했다. 1874년, 오쿠보 도시미치는 '식산흥업에 관한 건의서'에서 "국력은 국민의 빈부에 따라 좌우되고, 국민의 빈부는 물자의 많고 적음에 따라 결정된다. 물자의 많고 적음은 국민들이 산업에 주력하는지의 여부에 따라 결정되지만, 그 바탕에는 정부의 유도와 장려가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깔려 있다."라고 주장했다. 토지세 개혁 메이지 초기 봉건 번주들에게 판적봉환을 명령한 직후, 세스현의 일개 현령인 무쓰 무네미쓰가 종전의 토지 측량법을 바꾸어 전국적으로 .. 2023. 12. 30.
[일본 근현대사]#19_메이지 유신과 세이난 전쟁(2) 유신 원로들의 폭동을 제압하고, 처형하여, 규슈 지역은 오쿠보 도시미치 정부에 대한 민심이 박살날대로 박살 났다. 언제 반란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가고시마에 특권을 주는 회유책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사족들의 반란을 줄이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오쿠보 도시미치는 그래도 믿는 구석이 있었는데, 바로 같은 *유신 삼걸이었던 사이고 다카모리였다. 그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통치력을 믿고 있었다. 그가 결코 경솔하게 반란을 주도할 사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유신 삼걸 :기도 다카요시,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그러나 가와지 도시요시는 치안 책임자로서, 가고시마로 사람을 보내 동향을 살피는 것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다. 당시 정부의 무기고는 사이고 다카모리가 .. 2023. 12.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