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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26_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메이지 유신 1874년, 사족의 반란이 정부의 과감한 '군국 정치'에 의해 진압되고 나서 오쿠보 도시미치가 반란의 주동자인 에토 신페이를 심문했다. 그는 한때 함께 활동하던 동지의 변론을 듣고는 그날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에토의 추태가 그야말로 우스울 따름이었다." 나흘 후, 에토 신페이는 처형당했다. 그러나 그때 일본 전역의 대학교와 중학교, 소학교에서는 여전히 에토 신페이의 주도로 제정된 학제가 시행되고 있었다. 에토 신페이는 1871년 7월 새로 설립된 문부성(우리나라 교육부 같은 역할) 대보로 임명되어 교육 행정을 맡게 되었다. 그가 처음으로 착수한 사안이 바로 일본 전역에 있는 학교의 학제 통일이었다. 메이지유신 이전, 막부 시대의 교육 일본은 막부 시대부터 교육을 중시하는 전통이 있었다. 주요 .. 2024. 1. 3.
[일본 근현대사]#25_메이지 유신, 계몽의 서막 메이지 6년(1873년), 역사적으로 유명한 계몽 학술 단체인 '명육사'가 탄생했다. 그해 7일, 미국 주재 일본 공사 모리 아리노리가 귀국한 후 문학계 및 교육계 유명 인사들을 주축으로 학술 단체를 조직하고 문명개화 정책을 추진할 것을 건의했다. 메이지유신 계몽운동 니시무라 시게키의 노력으로, 츠다 마미치와 니시 아마네, 나카무라 마사나오, 가토 히로유키, 미쓰쿠리 린쇼, 미쓰쿠리 슈헤이, 스기 고지, 후쿠자와 유키치 등 일본 제일의 서양학자들이 학술 단체 조직에 대해 지지의 뜻을 밝혔다. 9월, 비로소 명육사가 설립되었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대표로 추대되었지만 그가 고사하여 스기 고지가 초대 대표가 되었다. 이듬해 3월, '명육잡지'가 발간되었다. 니시무라 시게키는 창간호의 창간 취지문에서 "일본의 .. 2024. 1. 3.
[일본 근현대사]#24_메이지 유신, 개화의 바람이 불다. 1873년 3월 20일 오후, 황궁에서 천황의 시중을 드는 여관들이 여느 때처럼 천황이 있는 어학문소에 도착했다. 그들은 여느 때처럼 천황의 머리를 빗겨주고, 당시의 궁중 풍습에 따라 천황의 얼굴에 분과 연지를 발라주어야 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간 여관들이 그 자리에서 멈칫 서더니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천황이 자기 머리카락을 잘라버린 것이 아닌가. 이는 일본 역사상 처음 벌어진 일이었다. 서양 문명을 좇아서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일본인들은 머리를 길게 길렀다. 그리고 무사들은 양쪽에 검을 차고 다닐 수 있는 권력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그들의 신분을 상징하는 것이자 생활 풍습이었다. 당시 일본에는 계급 제도가 매우 엄격해 화족과 평민의 통혼은 금지되었고, 옷차림만으로도 신분이 어떻게 되는지를 판.. 2024. 1. 2.
[일본 근현대사]#번외_'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 시부사와 에이이치 시부사와 에이이치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70세가 되도록 수많은 사업을 경영했다. 그는 자본주의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물이었으며, 자본주의의 기본인 이윤 추구를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윤을 추구하더라도 도덕과 윤리 규범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도 행동해야 하며, 오로지 이윤만을 추구하는 것 역시 옳은 행동이 아니라며 날 선 비판을 하였다. 당시까지도 일본에 널리 퍼져있던 유교적 사고관은 장사를 굉장히 불결한 것으로 간주했으며, 장사에 대한 이야기를 입에 담는 것을 수치스러운 일로 여겼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70세 이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자신의 널리 알리기 위해 '논어와 주판'이라는 저서를 저술하였고, 본인의 주장을 담은 오디오 레코드를 제작해 사회적으로 홍보하였다.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살던 시대.. 2024. 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