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분류 전체보기251

[일본 근현대사]#19_메이지 유신과 세이난 전쟁(2) 유신 원로들의 폭동을 제압하고, 처형하여, 규슈 지역은 오쿠보 도시미치 정부에 대한 민심이 박살날대로 박살 났다. 언제 반란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가고시마에 특권을 주는 회유책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사족들의 반란을 줄이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오쿠보 도시미치는 그래도 믿는 구석이 있었는데, 바로 같은 *유신 삼걸이었던 사이고 다카모리였다. 그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통치력을 믿고 있었다. 그가 결코 경솔하게 반란을 주도할 사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유신 삼걸 :기도 다카요시,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그러나 가와지 도시요시는 치안 책임자로서, 가고시마로 사람을 보내 동향을 살피는 것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다. 당시 정부의 무기고는 사이고 다카모리가 .. 2023. 12. 29.
[일본 근현대사]#18_메이지 유신과 세이난 전쟁(1) 세이난 전쟁이 일어났을 때 가와지 도시요시는 도쿄 경시청의 수뇌로서 가고시마의 동향을 예의 주시했다. 과거 유신의 영웅이었던 사이고 다카모리가 그의 고향인 가고시마에서 폭동을 일으키려 했기 때문이다. 세이난 전쟁 메이지 6년, 10월 정변이 일어난 후, 사이고 다카모리, 에토 신페이,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공직을 사퇴하고 메이지 정부를 떠났다. 메이지 유신 과정에 큰 공을 세운 그들이었지만 정부를 정한론을 둘러싸고 오쿠보 도시미치를 비롯한 내치파와 대립하다가, 정부를 떠난 후에는 불평사족의 중심 역할을 맡았다. 오쿠보 도시미치의 개혁 방향은 사족의 이익을 직접적으로 침해하는 부분이 있었기에 이 갈등은 훗날 세이난 전쟁으로 발발했다. 유신 원로들의 반란 1874년부터 몇몇 메이지 유신 원로들이 폭동을 일으키.. 2023. 12. 29.
[일본 근현대사]#17_경찰 제도 개혁과 무사 계급의 몰락 메이지 6년(1873년)은 큼직큼직한 사건들이 계속해서 발생한 해였다. 그해 일본 역사에는 수많은 사람의 이름이 등장하고, 또 많은 유학생이 유럽과 미국에서 귀국해 일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경찰 제도 수립, 국내를 다스릴 수단 기도 다카요시와 오쿠보 도시미치가 구미 시찰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이자 10월 정변이 일어나기 직전인 9월, 가와지 도시요시도 구미 시찰을 마치고 귀국했었다. 그는 경찰 제도 관련하여 담당하고 있었다. 폐번치현을 실시하기 전 일본의 경찰과 군대는 구분이 모호했다. 군대도 일상적인 치안 관리에 참여해 도쿄의 경찰을 '부병'이라고 부르고, 전국 각지에 현병과 구병이 있었다. 1871년 이후, 전국적으로 경찰의 명칭이 나졸로 바뀌었다. 1872년에는 사법성 내에 경보료를 설치해.. 2023. 12. 28.
[일본 근현대사]#16_메이지유신의 군사력 확충, 징병제 도입 1872년,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정부에 '군비 의견서'를 제출하고, 유럽의 군제를 본떠 징병제를 실시할 것을 건의했다. 1872년 말부터 1873년 초까지 사절단이 유럽을 시찰하고 있던 시기에 천황은 '징병조서'를 선포하고, 태정대신이 '징병고유'와 '징병령'을 발표했다. 또 1872년에는 육군과 해군을 두는 국제적인 추세에 발맞추기 위해 구시대적인 분위기가 짙은 병부를 폐지하고 군대를 관리하는 육군성과 해군성을 설립하고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육군성 대보로, 막부에서 군대 총감을 역임한 가쓰 가이슈를 해군성 대보로 임명했다. 징병제는 육군을 복무 기간 3년의 상비군과 2년의 후비군, 국민군으로 분류해 입대자가 3년간 현역으로 복무한 뒤 제1 후비군과 제2 후비군으로 각각 2년씩 총 7년간 복무하도록 했으며.. 2023. 12.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