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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14_메이지유신 정한론 vs 내치파, 그 승자는? 서구 시찰의 주역인 사이고 다카모리는 정부의 참의로서 1년 반 동안 폐변치현과 군제 개혁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그는 도쿄의 들뜬 분위기에 불만을 가졌고, 정부가 상업관리소로 전락했다며 비난을 아끼지 않았다. 바로 이때, 육군대보인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대장대보인 이노우에 가오루가 상인들과 결탁하여 공금을 횡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정부가 분열될 위기에 처했다. 더욱이 사쓰마 출신의 군관이 1872년부터 정부에 타이완 공격을 주장하자,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생인 사이고 쓰구미치가 적극적으로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정한론 한편 조선과의 관계 역시 악화 일로를 걸었다. 메이지 유신 전까지 막부는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지 못하게 했으며 양국 간의 사안은 가운데에 있는 대마도 번주가 처리하도록 하였다... 2023. 12. 27.
[일본 근현대사]#13_프로이센, 메이지유신의 롤모델이 되다. 서구 각국의 교육 보급 실태도 사절단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기도 다카요시는 일본인이 서양인과 크게 다를 바가 없지만 배움의 차이만큼은 절대적으로 다르다고 말했다. 교육 제도 미국의 교육 보급률은 일본을 비교 불가하게 앞서 있었다. 일본은 근대화하기 위해서는 인재 육성은 불가피한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학교 설립이 우선 과제라고 강조했다. 사절단은 동서양 전통 사상의 차이로 인해 교육의 내용도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결론지었다. 서양에서는 근대 과학 지식과 실용적인 학문을 중시하고 유형의 학문을 강조하는 반면, 동양에서는 오래전부터 중국에서 발원한 유학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현실적이지 못한 무형의 학문을 강조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런 교육의 차이가 동서양의 빈부 격차를 초래한 원인이라고 보았다. 다시 말해 .. 2023. 12. 26.
[일본 근현대사]#12_구미 사절단의 서구 열강 방문 이와쿠라 사절단은 태평양을 가로질러 1872년 1월 15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지만, 폭설과 바람으로 발이 묶여서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보름 동안 체류할 수밖에 없었다. 부사인 이토 히로부미는 이 기간에 조약 개정 요구안을 작성했다. 일본은 안세이 조약의 효력이 1872년 7월로 만료되면 구미 각국의 정치 제도와 풍습, 교육 등을 일본에 도입해 국력을 강화함으로써 일본을 열강과 같은 선진국 대열에 올려놓기를 희망했다. 미국 방문 1월 21일, 사절단이 워싱턴에 도착해 그랜드 미국 대통령이 주최하는 성대한 연회에 참석했다. 사절단은 미국의 선진화된 항해 기술과 철도 기술, 그들과 다른 신기한 풍습에 감탄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조약 개정 단계에서 사절단은 미국의 또 다른 면을 발견했다. 이와쿠라 도모미는 해밀.. 2023. 12. 26.
[일본 근현대사]#11_폐번치현, 일본 메이지유신의 시작 '판적봉환' : 다이묘들이 판(토지)과 적(농민)을 천왕에게 반납한 일. 사쓰마, 조슈, 도사, 히젠 등의 신정부 주도 세력이 앞장서서 봉환함으로써 다른 다이묘들도 이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판적봉환이 성공적으로 진행됨으로써, 전국 토지와 농민은 천황, 다시 말해 중앙 정부의 소유가 되었다. 1869년 2월, 위의 네 번은 웅번들이 도막 파의 압력에 의해 천황에게 판적봉환을 실시해야 한다는 상주를 올렸다. 그해 7월, 이미 236개 번의 판적(땅과 농민)이 봉환되어 각 번의 번주들이 백성과 토지에 대한 봉건 영유권을 상실하기는 했지만, 번의 칭호는 유지했으며, 옛 번주가 번지사로 임명되어 각 번의 최고 행정 장관이 되어 중앙 정부의 명령에 따라 번을 통치했다. 다이묘와 구게의 칭호는 폐지되었으며, 모두 .. 2023. 12.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