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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2_일본의 개항전후 상황과 페리제독 1600년대 일본 에도에는 막번 체제가 수립되었다. 교토와 나고야 사이에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 전쟁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반대 세력 사이에 일어난 전투로, 도쿠가와는 동군, 반대 측을 서군이라 하여 '동서 전투'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전투에서 동군이 승리하게 돼 일본의 전국시대는 최종적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하며, 에도 막부가 형성되었다. 개항 전 일본의 상황 일본에는 200여 개의 번과 다이묘가 있었는데, 도쿠가와파가 승리한 후 도쿠가와파 다이묘들은 모두 봉록을 하사 받았다. 반면, 반대파였던 도요토미 세력 쪽 다이묘들은 영지를 잃거나 심하게는 다이묘 신분을 박탈당하기도 하였다. 260여년간 쇄국 체제가 시작됐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기독교로 인해 시작된 내전이었다. 외국 종교를 둘러.. 2023. 12. 18.
[일본 근현대사]#1_일본의 개국, 구로후네의 위협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끌고 온 검은 선박 4척이 완전무장을 한 채 일본의 문을 두드렸다. 이를 계기로 아시아 극동에 있던 섬나라 일본은 운명을 달리하게 된다. 그로부터 50년 후, 일본은 아시아 국가로서는 유일하게 세계 강대국 대열에 오른다.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고 100년이 지난 1968년, 일본은 세계 제3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다. Intro 18세기 말부터 서양의 군함들이 일본에 자주 출몰했고, 그로 인한 풍랑은 일본이란 동양 변방의 섬 국가를 점점 옥죄었다. 가장 먼저 일본을 충격에 빠뜨린 건 러시아였다. 19세기에는 영국과 미국이 일본의 새로운 위협으로 등장했다. 1808년 영국 군함이 네덜란드 국기를 걸고 나가사키 항으로 들어왔다. 당시 나가사키 부교였던 마쓰시다로 야스히데는 막부.. 2023. 12. 18.
[러시아사]#27_예카테리나의 러시아 영토 확장 "나는 빈손으로 러시아 땅을 밟았지만 마침내 러시아에 나의 혼수품으로 크림반도와 폴란드를 줄 수 있게 됐다." 예카테리나는 역대 러시아 차르들과 마찬가지로 영토에 대한 집착이 있었다. 전쟁을 통한 영토 확장을 영광스러운 일로 여겼기에 계속해서 영토 확장을 위한 전쟁을 벌였다. 전쟁을 좋아하는 여황제의 명령을 받든 수보로프와 쿠투조프는 마침내 표트르 대제조차 이루지 못한 꿈을 실현해 냈다. 바로 오스만 튀르크의 수중에 있던 흑해의 북쪽을 모두 뺏어와 장악해 버린 것이다. 예카테리나의 정치력은 침략 전쟁에서도 그 빛을 발했다. "정치는 세 가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바로 환경, 계획, 그리고 시기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그녀는 폴란드 영토 획득에도 그 철학을 적절히 사용하였다. 1763년 10월, 폴란.. 2023. 12. 15.
[러시아사]#26_왜 예카테리나는 계몽사상을 포기하였을까 예카테리나의 계몽사상을 토대로 한 개혁 시도에도 불구하고 귀족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노예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녀를 가장 가까이하는 신하들조차도 예카테리나 2세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자신의 이상과 러시아의 현실 사이에 괴리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막말로 예카테리나 본인이 계몽사상을 실현할 이유는 사실 없었다. 쨌든, 그 당시 계몽사상의 내용은 상당히 파격적이었고, 이를 강행할 시 그간 쌓아온 모든 업적을 단방에 무너뜨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대제국 건설에 있어서 더 필요한 것은 어쩌면 만인의 평등이 아니라 농노제였을 것이다. 저렴한 노동력은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되니 말이다. 노예는 러시아 제국의 확장과 전쟁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그들은 주인을 위해서는 무료로 .. 2023. 12.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