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251 [영국]#48_산업혁명이 태동하는 영국의 상황 왜 산업혁명은 방직기로 시작하였는가 영국은 인도를 식민지 삼으면서 오히려 목화 산지인 인도에 거대한 시장을 제공한 꼴이 되었다. 이에 따라 영국 대중들 사이에서 인도에서 수입한 우수한 면직물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영국 내 면직물 소비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영국의 방직업은 모직물 중심이었기 때문에 인도의 수공 면방직과 근본적으로 경쟁이 되지 않는 면직물은 거의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그 당시 영국은 자유무역 정신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1700년, 중상주의를 기본 국책으로 표방하던 영국 의회는 방직 업체들의 거센 압력을 받아 인도산 면직물인 캘리코의 수입을 금지하는 법률을 통과시킨 데 이어 이를 판매하는 것도 금지했다. 하지만 식민지에 불과했던 인도는 영국의 이러한 보호무역 조치에 아무런 .. 2024. 8. 15. [영국]#47_미국의 독립과 영국 면직물 산업의 호황 잘 나가던 대영제국과 미국의 독립 영국은 식민지를 날로 팽창하면서 핵심사업의 하나인 무역 블록 형성도 활발해졌다. 이에 대해 영국의 경제학자 윌리엄 제번스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북아메리카와 러시아의 평원은 영국의 옥수수농장이고, 시카고와 오데사는 식량창고이다. 캐나다와 발트해는 영국의 숲이고, 오스트레일리아는 양 목장에 해당하였다. 아르헨티나와 미국 서부 초원에는 영국의 소 떼가 자랐고, 페루에서는 백은을 보내온다. 남아프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의 황금이 런던으로 흘러 들어오고, 인도와 중국에서는 영국으로 보낼 찻잎을 재배한다. 동인도 제도에서는 커피, 사탕수수, 향료 등을 들여온다. 스페인과 프랑스는 영국의 포도밭이고, 지중해는 과일 농장이다. 영국인은 미국 남부에서 재배되는 목화를 오랫동안 써왔지만.. 2024. 8. 14. [영국]#46_영국, 프랑스를 밀어내고 세상을 호령하다 7년 전쟁을 대하는 영국의 자세 그래도 동맹국으로서의 의리를 보이기 위해 영국은 독일 서부에 6만 군대를 주둔시켰다. 하지만 이 부대의 활약은 프랑스군에 첫 승리를 거둔 이후로는 별다른 활약이 없었다. 1760년, 이 지원군은 러시아 군대가 프로이센을 침공해 수도 베를린을 유린하는 것을 좌시했다. 영국은 유럽 대륙에서 전쟁을 수수방관했던 것과는 달리 해상과 해외식민지 쟁탈전에서는 강대국의 위용과 기개를 드러냈다. 영국 해군은 프랑스 연안을 철저하게 봉쇄하고 연안 도시에 무자비한 폭격을 가했다. 북아메리카와 인도 식민지 쟁탈전에서는 막대한 전쟁 이익을 얻기 위해 그야말로 전력투구를 펼쳤다. 영국은 해상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면서 북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만약 식민지 전쟁이 전 세계로 .. 2024. 8. 13. [영국]#45_유럽내 전쟁을 통해 프랑스를 견제하다 젠킨스 귀 전쟁 때로 전쟁은 상상을 뛰어넘는 해괴한 이유나 사소한 일에서 촉발되기도 한다. 강대국 간의 전쟁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 때마침 발생했다. 1738년 의회가 개회 중일 때, 로버트 젠킨스라는 영국 선장이 하원을 찾아왔다. 그는 잘린 귀가 담긴 병을 꺼내 보이며 1731년에 스페인 경비대에 나포되었을 때 귀를 잘렸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의회가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정의를 실현해 줄 것을 청원했다. 젠킨스 선장은 진실만을 말하겠다고 선서했지만,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지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럼에도 젠킨스의 출현은 영국 의회의 반스페인 정서에 불을 지폈다. 정권을 잡고 있던 휘그당 당수 로버트 월폴은 여론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영국 군함을 지중해로 파견했다. 영국.. 2024. 8. 12. [영국]#44_유럽 열강의 각축전 유럽 열강의 각축전 1500년 이후 강대국 간의 경쟁에서 한 가지 특이한 현상을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한 세기마다 영국의 경쟁상대가 바뀌었고, 상대국을 차례로 격파하면서 영국은 더욱 강대해졌다는 점이다. 16세기에 영국의 적수는 스페인이었다. 영국인은 이 노련한 식민지 강국을 침몰시키고 새로운 해양 강국으로 떠올랐다. 17세기에는 네덜란드를 누르고 세계 최강의 해양 강국으로 등극했다.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식민지 쟁탈을 둘러싸고 프랑스와 접전을 벌인 결과, 승리를 얻게 된다. 1688년의 명예혁명 이후, 영국은 '바다의 마부'로 불리던 네덜란드를 꺾고 신흥 해상 패권국이 되었다. 하지만 더 큰 발전을 위해서는 아직도 많은 장애물이 남아 있었다. 유럽 대륙의 패권국가인 프랑스와의 결전을 피할 수 없었다.. 2024. 8. 11. [영국]#43_대영제국으로 가는 과정 영국의 식민 통치 방식 18세기 영국의 식민 통치는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처럼 강압적이진 않았다. 영국은 북아메리카와 카리브해의 식민지에서 대부분 선거를 통해 식민지 정부를 구성했다. 따라서 런던 정부의 간섭은 제한적이었다. 반면,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중앙집권적 관리방식을 통해 식민지를 지배했다. 18세기뿐 아니라 19, 20세기에 걸쳐 영국이 거대한 식민제국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영국 정부가 식민지 정부에 좀 더 많은 책임과 권리를 부여해 불만을 조금이나마 더 줄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영국의 영향력 확대 및 제국의 성장 7년 전쟁이 끝난 후, 영국은 급속도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프랑스가 캐나다에서 쫓겨나다시피 하면서 북아메리카도 영국인의 수중에 들어갔다. 아프리카에서도 영국과 영토분쟁을 하던 프랑.. 2024. 8. 10. [영국]#42_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합병하다, 유니언 잭의 등장 영국의 자유사상을 발전시킨 요소 자유사상 발전과 관련하여 우선 영국이 섬나라인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국은 섬나라이기 때문에 외부의 침략이나 공격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이 점은 영국이 안정적으로 발전하는 데 긍정적인 요소였다. 또한 영국은 일찍부터 의회제도를 운영해 왔기 때문에 개방적인 토론과 논쟁, 그리고 언론 활동이 활발하였다. 일상생활에서도 영국인들이 토론하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종교적으로도 신교는 구교인 가톨릭보다 훨씬 더 개방적이다. 가톨릭은 근본적으로 전제적인 종교였다. 로마 교황과 추기경들의 결정이 신도들에게 전해지고, 신도들은 성서의 해석을 그대로 따라야 하는 의무가 있다. 실제로 90퍼센트의 사람들은 라틴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라틴어로 .. 2024. 8. 9. [영국]#41_영국의 입헌군주제와 존 로크 사상 강력한 군주와 전제 군주 유럽과 영국 사회가 중세에서 현대로 넘어갈 때, 강력한 군주제도는 필수적으로 거쳐야 할 과정이었다. 강력한 군주는 이들 국가에 큰 이득을 가져다주었으며, 국왕은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명확히 제시해 주는 '애국주의'의 표상이었다. 16, 17세기에 군주들은 각 민족국가의 부흥을 이끌었다. 하지만 강력한 왕권이 전제정치를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전제적인 군주는 신민의 의견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반대에 부딪혔을 때도 결코 이를 수용하거나 타협하지 않았다.입헌군주제의 형성 1688년 이후, 영국에서는 입헌군주제가 정착하게 된다. 군주는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게 된 것이다. 국왕은 정책을 결정할 때 의회의 동의를 거쳐야 했으며, 외국과 조약을 체결할 때도 의회의 비준을 얻어야 했다.. 2024. 8. 8. [영국]#40_권리장전을 통해 입헌군주제 확립하다 권리장전과 입헌군주제 확립 1689년 2월 13일, 의회는 윌리엄 부부를 위해 웅장하고 성대한 대관식을 거행했다. 전례는 까다롭기 그지없었지만, 새로운 국왕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에 대한 신민들의 애정과 신뢰가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이때의 대관식은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의회 대표였던 핼리팩스 경이 두 군주에게 왕관을 헌납하고, 잠시 후 의회의 정신을 담은 주요 문건인 '권리선언'을 국왕들에게 전달했다. 이미 합의된 내용이었기에 새로운 국왕 부부는 대중을 향해 '권리선언'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마그나 카르타'의 정신을 계승한 이 선언문은 영국 사회의 자유주의 정신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는 각종 '권리'를 시민과 국왕 사이의 '계약' 형식으로 규정한 영국 헌정 제도의 근간이 되는 문건이었다. .. 2024. 8. 7. 이전 1 2 3 4 5 6 ··· 2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