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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57_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사상을 펼쳤다. "경쟁은 독점이 아니라 국가의 부를 증대시키는 동력이다. 모든 상업에서 이득을 얻는 법칙은 가능한 한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구매는 모든 국가가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물건을 거래할 때 가능하며, 동시에 가장 이상적인 판매는 시장에 소비자가 아주 많을 때 가능하다." 그는 한 국가의 경제가 가장 자유롭고 여유로울 때 발전을 이룰 수 있으며, 국가의 지나친 간섭은 경제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아무런 제약 없이 순전히 경제법칙을 따르기만 하면, 어느 국가든 부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스미스는 경쟁이 어떻게 사회를 발전시키는가에 대해서 그 유명한 '보이지 않는 손'의 이론을 들어 설명.. 2024. 8. 27.
[영국]#56_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의 생애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 18세기는 영국의 산업혁명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다. 제임스 와트와 맽 볼턴이 버밍엄에서 증기 엔진의 완성에 다가가고 있을 무렵, 런던에서는 50세 된 한 학자가 책을 출간하기 전에 마지막 원고를 손보고 있었다. 이 원고는 아주 특별한 엔진, 즉 사상의 엔진이 나타나 인류의 부를 증대시키는 데 끊임없는 '동력'을 제공해 줄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원고는 '국가의 부의 성질과 원인에 관한 고찰(이하 '국부론')'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의 저자가 바로 애덤 스미스(1723~1790)이다. 그는 이 책에서 당시 영국을 휩쓸던 중상주의 경제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1621년, 영국의 경제학자 토머스 먼은 '영국에서 동인도로의 무역론'을 발표하여 중상주.. 2024. 8. 26.
[영국]#55_중앙은행의 어머니, 잉글랜드 은행 뉴턴과 로버트 훅의 논쟁 아이작 뉴턴은 그다지 대인관계가 좋지는 못했다. 그는 당대에 유명한 과학자 로버트 훅과 어떤 이론을 누가 먼저 생각해 냈는지를 두고 자주 논쟁을 벌였다. 일화에 따르면, 뉴턴은 훅을 지독히 싫어해서 그의 초상화를 모두 없애버렸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오늘날 뉴턴의 초상화가 4~5장 정도 남아 있는 것에 비해, 훅의 초상화는 단 한 장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뉴턴 체계의 본질 뉴턴은 전통적인 연금술에 깊이 심취해 있었다. 그는 그 비밀을 캐내기 위해 엄청난 시간을 들여 연구했다. 뉴턴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에서 우주 공간에 작용하는 중요한 개념에 대해 제시하였다. 그 힘은 분명 존재하지만 증명할 수도, 또 증명할 필요도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그의 생각은 연금술에 대한 연구에서.. 2024. 8. 24.
[영국]#54_아이작 뉴턴과 과학혁명 두번째 이야기 아이작 뉴턴, 그 이후의 삶 과거 인류의 사상은 미신과 공포감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물은 왜 아래로 떨어질까? 태양은 왜 떠오르고 지는 걸까? 등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간단한 문제이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신의 신비한 힘'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뉴턴이 등장하면서부터 인류는 무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위대한 저작을 통해 과학 시대의 도래를 널리 알렸다. 신의 발아래 꿇어 있던 인류는 비로소 제 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서양인은 인류에 끼친 영향력에 비추어 이슬람교를 창시한 마호메트 다음으로 뉴턴을 꼽기도 한다. 뉴턴이 본 세상은 정확한 법칙과 원리에 의해 지배되는 곳이었다. 그리고 만유인력이 바로 그 중심에 있었다. 인력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행성은 예.. 2024. 8. 23.
[영국]#53_아이작 뉴턴과 과학혁명 첫번째 이야기 아이작 뉴턴과 과학혁명 근대 과학의 기원을 따지자면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근대 과학의 대표적인 인물은 다름 아닌 아이작 뉴턴(1642~1727)이다. 뉴턴이 발표한 학설은 산업혁명보다 80년을 앞서 있다. 그 때문에 수많은 역사가는 뉴턴이 산업혁명에 기여한 공적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위대한 과학자의 사과나무 에피소드는 대다수의 사람에게 이미 친숙한 이야깃거리이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 본관 근처에 있는 사과나무는 후대 사람들이 뉴턴을 기리기 위해 심은 나무이다. 하지만 실제로 뉴턴이 머리에 사과를 맞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뉴턴의 등장은 17세기 과학혁명을 끌어냈다. 뉴턴과 동시대에 살았던 한 작가는 뉴.. 2024. 8. 22.
[영국]#52_영국의 루너 소사이어티 그리고 증기기관차의 등장 산업가의 산실, 루너 소사이어티 루너 소사이어티(Lunar Society, 달 협회)는 영국 중부의 산업지대에서 생겨난 모임이다. 회원들은 대부분 버밍엄 혹은 그 근처에 거주했고, 모두 산업사회의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이었다. 공장주만 아니라 의사나 과학자, 자연철학자, 교사 등 각기 다른 배경을 지난 사람들이 매달 모임을 가졌다. 18세기에 영국의 중부지역은 이미 산업의 중심지였고, 이들은 과학에 매우 깊은 관심을 보였다. 회원들은 대부분 선진적인 사고와 현대적인 의식을 지닌 사람들이었고, 한 달에 한 번씩 보름달이 뜨는 밤에 모여 자연철학과 공업, 의학 등에 대한 문제를 토론했다. 모임의 명칭은 주로 밤에 모이던 이들이 밤길에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도록 달 밝은 밤을 택했다는 데서 붙여졌다고 한다. 이.. 2024. 8. 21.
[영국]#51_근대 과학의 발전과 프랜시스 베이컨 영국, 근대 과학의 발전 1785년, 영국에는 증기를 동력으로 사용하는 최초의 면방직 공장이 들어섰다. 1830년대 이후, 증기 동력은 면방직 산업에 널리 보급되었고 차츰 수력의 비중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산업혁명의 선두에 섰던 면방직 산업은 또다시 증기 동력 기계를 도입한 최초의 산업이 되었다. 기계의 증기 동력화가 완성되면서 공장제도가 점차 확립되기 시작했다. 1840년이 되자 면방직 산업에 종사하는 공장노동자 수는 수공 노동자 수의 두 배를 넘어섰다. 와트 기관의 등장으로 인해 방직, 채광, 야금 등의 산업도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특히 와트 기관을 제작하는 기계제조업이 특수를 누렸다. 1812년에는 증기기관을 이용한 선박이 등장했고, 1814년에는 조지 스티븐슨이 세계 최초로 증기기관차를 제작하여.. 2024. 8. 20.
[영국]#50_증기기관의 등장, 산업혁명에 박차를 가하다 증기기관의 등장, 산업혁명에 박차를 가하다 부와 명예를 갈구하던 대부분의 영국인은 모두 신기술과 신발명에 대해 열광적인 숭배에 빠져들었다. 당시 영국의 한 간행물에서는 "산업 기술의 발전은 전쟁이나 외교보다 더 큰 실리를 가져다준다. 이는 교회나 대학의 기능을 넘어서며, 추상적인 철학과 문학보다 더 크게 사회에 기여한다.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있어 법률보다 앞서는 것이 바로 기술의 발전이다."라고 논평했다. 전 국민이 기술개발에 몰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당시, 영국에 신흥계층이 등장했다. 이들은 기술과 발명에 가장 밀접하고 가장 열성적인 사람들이었다. 당시 '공장주'라고 불리던 이들 신흥계층은 오늘날에는 '기업가'라고 불린다. 1773년의 파산으로 절망에 빠진 와트를 구해준 이가 바로 매튜 .. 2024. 8. 19.
[영국]#49_ 산업혁명의 아버지, 제임스 와트의 생애 글래스고와 북아메리카를 이어준 담배 스코틀랜드 최대 도시인 글래스고는 당시 유럽 담배 무역의 중심지였다. 이곳의 담배 무역상들은 영국의 담배 교역량 중 절반 이상을 독점하고 있었다. 와트의 조부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담배 무역상들이 돈을 버는 방법은 아주 효율적이었다. 우선, 영국제 방직물과 기타 완제품을 배에 가득 싣고 콜럼버스가 발견한 뱃길을 따라 북아메리카로 갔다. 그리고 버지니아 등의 영국 식민지에서 물건을 다 팔고 나면, 그곳에서 생산한 담배를 가득 싣고 글래스고로 돌아온 뒤 유럽 각지로 역수출하는 것이었다. 배에 항상 화물이 넘쳐날 정도로 장사가 잘되었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무역업에 뛰어드는 사람들도 점점 많아졌다. 와트의 부친은 윗세대의 경험을 물려받아 조선소 사업을 벌였다. 그곳에서도 영.. 2024. 8.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