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251 [제주도][2024.07.15] 배낚시 체험하고 장보고 숙소에서 먹고 놀기 인생 첫 배낚시 체험배멀미할 거라 예상했고 역시나 배멀미했다. 배낚시는 2시간에 15,000원금액이 나쁘지 않아 도전해 봤다여름엔 밤에 한치 잡는 것도 있던데 우린 일반 배낚시 우리 말고 다른 팀도 있었는데우린 2명 빼고 10명이 해서 단독으로 진행했다. 2시간 지옥 시작 생각보다 배 타고 꽤 멀리 나갔다 선장님한테 엄청 혼났다어떻게 그렇게 제대로 하는 사람이 한 명이 없냐고 제대로 못하니 체험으로 왔지 ㅡㅡ 미끼는 다행히 새우젓(?)이었다. 밍구랑 준형이지난번 오사카에선 밍며들었고,이번 제주도에서는 준며들어버렸다.... 다행히 쉽게 빠져나옴 이 이름도 모르는 물고기가 제일 많이 잡혔다.얘는 회로도 안 되고, 구이용으로 손질해 줬다.저 등에 난 걸 뭐라 하더라 저게 꽤 딱딱해서 찔려서 피났다. '저런.. 2024. 7. 22. [제주도][2024.07.15] Off to Jeju & 올래국수 7월 15일 제주도를 다녀왔다. 벌써 일주일 전 역시 시간은 잘 가 오전 6시 40분 비행기라는 미친 강행군이때 뼈저리게 느낀 건..난 젊지 않아. 5시 6분 첫차 타고 가려했는데 20분이나 일찍 도착해 버렸다. 이번 여행은 총 12명이었는데,나를 뺀 11명은 같은 뱅기고 나만 다른 뱅기였다. 하핳핳그 뱅기 찾은 것도 난데!공항 가는 것도 나 빼곤 다 공항버스 하지만 정훈투어는 낙오 빼면 시체공항버스-비행기부터 첫 낙오자 발생 출발 전날까지 언제 가는지 모르는 애공항버스팀은 타기 10분 전까지 언제 타는지도 모르는 애공항버스 출발하고 한참 뒤에 일어난 애 단독으로 움직일 기회가 있다면 놓치지 마라! 정훈투어5인승, 7인승 차 두 대로 움직였는데,잘못검색해서 '제주올래국수' 들렀다가 왔다. 아침 일찍인.. 2024. 7. 22. [영국]#32_크롬웰, 영국의 호국경이 되다 크롬웰 집권하다 10여년간 전쟁을 치르며 새로운 이익집단으로 군대가 급부상하였다. 군대는 편히 앉아 탁상공론만 하는 의회에 대해 반감을 가졌다. 군대의 무력은 대개 그 권력의 기반이 된다. 군대는 자신들이 세금을 정하고 징수해서 고정적인 수입을 갖게 되기를 바랐지만, 곧 의회가 걸림돌이 되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1648년에 크롬웰이 병사들을 보내 자신에게 비협조적인 장로파 의원 140여 명을 의회에서 강제로 축출한 이래 의회에는 고작 90명의 의원만이 남아있었다. 이후에는 50~60명으로 대폭 축소됐다. 의회는 이렇게 몇 차례의 숙청을 거쳐 잔부의회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군대 편에 기울어 있던 크롬웰은 이 '골칫거리' 기구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이미 잔부의회는 '둔부 의회(영어로 '찌.. 2024. 7. 22. [영국]#31_찰스 1세의 죽음 이후의 영국과 크롬웰 찰스 1세 처형 이후의 영국 찰스 1세의 머리가 땅에 떨어진 후, 한 소년이 그의 머리를 집어 들며 소리쳤다. "보세요! 반역자의 머리예요!" 이 장면을 목격한 어느 성직자는 비통함과 회한으로 가득 찬 글을 남겼다. "소년은 국왕의 존귀한 머리를 마귀의 머리처럼 집어 올렸다. 관중은 미친 듯이 아우성을 질러댔다. 마치 지옥에 온 것 같았다. " 국왕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이 전 영국에 퍼지자 사람들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어쨌든 크롬웰 경이 군대를 장악한 뒤 의회를 압박하여 저지른 국왕 처형 사건은 민심을 잡진 못했다. 로렌스 에카드는 '잉글랜드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일부 병사들이 환호성을 지른 것은 그들이 끝까지 국왕과 맞섰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국왕의 머리를 높이 쳐들자 군중 .. 2024. 7. 21. [영국]#30_1649년 1월 30일, 찰스 1세 최후의 날 1649년 1월 30일, 영국 국왕 찰스 1세 처형의 날 기록에 따르면 이날은 바람이 가볍게 부는 화창한 날이었다. 수천 명의 런던 시민들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국왕의 처형식을 보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화이트홀 궁전 앞 광장에 운집했다. 광장이 바라다보이는 왕실 연회장의 방 안에서는 찰스 1세가 자신의 삶을 마감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방에는 찰스 스튜어트 혼자 있었다. 그는 자신의 등장을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을 보면서 자신이 군주였던 나날들을 떠올렸다. 따뜻한 겨울 햇살이 고개를 내밀었을 때, 찰스 1세는 아직 어린 두 아들과 눈물의 작별 인사를 마치고 홀로 앉아 기도를 시작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 나라에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 2024. 7. 20. [영국]#29_영국 내전 마무리, 찰스 1세 처형 찰스 1세가 처형되기까지 1649년에 이르기까지 찰스 1세는 국민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수년간 전란의 고통을 안겨주고 영국 내전을 초래한 주범이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단지 나라가 정상을 회복하고 안정을 찾기를 바랐지만, 국왕이 체포된 이후 갈수록 과격한 방향으로 치닫는 것을 보고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1649년에 찰스 1세가 사형판결을 받는 순간에도, 그는 소수를 제외한 대다수 사람에게 여전히 존귀한 국왕이었다. 그해 찰스 1세의 처형일인 1월 30일 아침, 아주 특별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사형수가 된 찰스 1세는 감옥에서 화이트홀 궁전의 왕실 연회장으로 이송되었다. 그런데 그곳은 바로 부왕 때부터 찰스 시대까지 공사감독관을 지낸 이니고 존스가 왕실의 최고 권위를 상징하기 위해 설계한 건축물이었다. .. 2024. 7. 19. [영국]#28_영국내전의 끝, 의회는 승리하고 찰스 1세는 처형당하다 영국 내전, 왕당파 vs 의회파 1642년 8월 22일, 결국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이날 찰스 1세는 노팅엄에서 깃발을 높이 쳐들고, 국왕을 배반하고 모반을 일으킨 의회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소리쳤다. 장장 6년에 걸친 영국 내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전쟁 초기에는 왕당파가 승리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곧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철기군'이 등장하면서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의회의 군대는 '자유'라는 이름으로 국민에게 호소하며 폭넓은 지지를 확보해 나갔다. 국왕의 지지자들은 모두 영국국교회의 수호자들이었고, 의회의 지지자들은 대부분 청교도였다. 이 전쟁은 흡사 종교전쟁처럼 보였지만 전쟁의 근본 원인은 종교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나라의 최고 권력을 누가 장악하는가의 문제였다. 국왕인가.. 2024. 7. 18. [영국]#27_존 햄던 사건 이후, 하원을 무단침입한 찰스 1세 찰스 1세의 하원 무단침입 오늘날 런던을 방문하는 외국 여행객들은 고색창연한 건축물과 전통 의식에 깊은 인상을 받곤 한다. 특히 이 전통 의식의 배경에 전해지는 일화를 알게 된다면 더욱 의미심장할 것이다. 템스강변에 자리한 웨스트민스터 궁전은 영국 의회의 소재지이기도 하다. 매년 영구 국왕이 의회를 방문해 연설할 때는 이곳에서 300년 동안이나 지속되어 온 영국 전통의 독특한 의식이 거행된다. 먼저, 영국 국왕이 상원에 출석하면 검은 지팡이를 든 사절이 하원의원들에게 국왕의 출석을 알리고, 상원으로 건너와 국왕의 연설을 들을 것을 통지하기 위해 건너편 하원 회의장으로 간다. 하지만 사절이 하원 근처에 도착할 즈음, 하원의 경비병은 그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회의장 문을 걸어 잠근다. 그러면 사절은 하.. 2024. 7. 13. [영국]#26_찰스 1세, 영국내전의 전초전 영국, 내전의 바람이 불다 왕권의 본질에 반대하는 것은 곧 전제정치를 반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현대국가에서 정치적 기반이 되는 필수 요소이다. 이런 맥락에서 영국인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적은 수업료를 내고 고도의 정치적 실험을 한 셈이었다. 햄던 사건으로 국왕의 권위가 실추된 데다 고갈된 재정을 채울 길마저 막막해진 상태에서 찰스 1세는 또다시 전쟁에 휘말렸다.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만약 이 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다면, 찰스 1세는 그의 아버지처럼 모든 책임을 후계자에게 물려준 채 조용히 생을 마감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것이, 이 전쟁은 바로 찰스 자신의 어리석음이 발발한 것이었다. 찰스 1세는 당시 청교도가 장악하고 있던 의회와 갈등하는 상황에서 장.. 2024. 7. 12. 이전 1 2 3 4 5 6 7 8 ··· 2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