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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7_실지왕(Lackland) 존, 영국의 왕이 되다 서유럽의 봉건제도 서유럽의 봉건제도는 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게르만족이 처음 실시한 제도이다. 이는 토지 분봉에 기초하여 권리와 의무 관계를 설정한 일종의 사회, 경제 제도였다. 이 제도를 통해 각 계층의 귀족들에게 토지가 분배됨에 따라 정치권력과 사법권, 정치적 특권 등도 나누어졌다. 즉, 봉건제도의 본질적인 특성은 바로 분권과 지방화인 것이다. 이 때문에 서유럽 봉건사회에서는 분열과 대립, 혼란이 끊이지 않았다. '로마 제국'처럼 강력한 통일 제국을 만들고자 했던 서유럽의 왕들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서유럽 봉건국가들의 공통점은 토지 분봉과 노역을 기반으로 한 등급제 사회이자 장원제 사회라는 것이었다. 영주와 봉신 간에는 계약 관계가 성립되었고, 각기 다른 권리와 의무를 .. 2024. 6. 19.
[영국]#6_'둠즈데이북', 더 많고 확실한 세금을 거두기 위해 토지를 정리하다 토지조사대장 '둠즈데이북' 1085년, 덴마크 국왕 크누트 2세가 잉글랜드 침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수백 년 동안 잉글랜드는 바이킹 해적들의 잦은 침략에 시달리던 불운의 땅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덴마크가 국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잉글랜드 침략계획을 포기하면서 곧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윌리엄 1세는 이 땅의 국왕으로서 해야 할 일을 생각하게 되었다. 급선무는 잉글랜드의 경제 상황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었다. 세금을 정확히 징수하여 국가와 군대가 재정 위기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윽고 영국 역사상 초유의 대규모 경제조사 작업이 개시되었다. 윌리엄은 조사위원을 파견하여 잉글랜드 전역의 도시와 촌락을 돌며 상세하게 조사하도록 했다. 특히 각급 봉신 및 자유농이 소유한 토.. 2024. 6. 18.
[영국]#5_윌리엄 1세와 솔즈베리 서약 솔즈베리 서약 잉글랜드 남부 윌트셔에 자리한 소도시 솔즈베리는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고도이다. 또한 선사시대의 거석 기념물인 스톤헨지가 발견되어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린 도시이기도 하다. 스톤헨지는 수십 톤에 달하는 무겁고 거대한 돌기둥이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는 구조물이다. 이 유적에 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누가 어떤 방법으로 건조했는지, 그리고 그 용도가 무엇이었는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인해 스톤헨지는 세계 불가사의 중 하나로 신비한 후광과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영국 역사를 좀 더 이해하게 된다면 이 소도시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이 스톤헨지 못지않은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1086년 8월 1일, 정복왕 윌리엄은 잉글랜드에서 토지를 보유한 모든 봉건 귀족을 솔즈베.. 2024. 6. 17.
[영국]#4_정복왕 윌리엄 1세 윌리엄, 잉글랜드의 왕이 되다 영국의 민간에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윌리엄은 군대를 이끌고 상륙하면서 배에서 내리다가 발을 헛디뎌 엎어지고는 오히려 "잉글랜드를 이 손안에 넣었다."라고 큰소리치며 일어났다고 한다. 그가 잉글랜드 정복에 얼마나 들뜨고 집착했는지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침략자들은 보름 동안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동쪽으로 진격하여 서식스의 헤이스팅스에 이르렀다. 이윽고 윌리엄이 이끄는 5,000명의 정예부대와 헤이스팅스의 산등성이에 진지를 구축한 7,000명의 해럴드 측 군사 간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렇게 반나절 가까이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졌다. 해럴드가 조직한 방어진이 마치 견고한 석벽처럼 큰 위력을 발휘하면서 윌리엄의 군대는 하루 종일 화살과 기병대의 공격을 번갈아 퍼붓고도 .. 2024. 6. 16.
[영국]#3_1066년, 영국 역사의 변곡점 '왕위쟁탈전' 1066년, 영국의 왕위쟁탈전 기원후 1000년이 지나면서 잉글랜드는 통일을 이루고 덴마크의 지배에서도 벗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성장할 조짐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11세기 전반기에 잉글랜드의 왕위는 빈번하게 교체되었다. 막강한 세력을 가진 귀족들은 기회만 되면 왕위를 차지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각축을 벌였다. 독실한 그리스도교였던 참회왕 에드워드(1003?~1066)는 이런 정치판에는 무관심했다. 그는 왕권에 대한 애착보다 경건한 신앙심을 더 중시했기 때문에 세속 왕국보다는 하나님의 왕국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 1066년, 참회왕 에드워드가 세상을 떠났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임종 때 웨식스 백작 해럴드를 후계자로 지명했다고도 하고, 그 훨씬 전에는 자신의 먼 친척인 노르.. 2024. 6. 14.
[영국]#2_브리타니아-로마 제국의 속주 브리타니아, 로마 제국의 속주가 되다 기원후 43년,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BC 10 ~ AD 54)는 다시 브리튼을 정복하여 로마 제국의 속주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기원전 54년에 카이사르의 군대가 브리튼 섬을 떠난 후, 거의 1세기가 다 되도록 로마는 내분으로 인해 브리튼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게다가 근 30년간이나 정복 전쟁으로 공을 세울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로마 제국 황제와 군인들은 오랫동안 참아온 정복욕을 해소할 대상이 필요했다. 이때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브리튼이었다. '브리튼 정복자'야말로 정복욕의 물꼬를 터줄 최적의 명분이었다. 그는 위대한 카이사르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이 로마 군대의 사명이라 여기고 브리튼 원정을 결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43년, 로마 군단의.. 2024. 6. 13.
[영국]#1_카이사르-브리튼 전기 카이사르-브리튼 전기 고대 로마 공화국의 통치자였던 율리우스 카이사르(BC100~BC44)는 '갈리아 전기'에서 브리튼 원주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브리튼족은 모두 대청이라는 풀을 이용해 온몸을 물들이고, 얼굴색은 특히 파랗게 보이도록 했다. 그래서 전투 중에 더욱 무섭게 느껴졌다. 또 그들은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고, 머리와 콧수염을 제외한 온몸의 털을 밀기도 했다. 특이하게도, 십여 명의 남자들이 한 아내를 공유하거나 형제간 또는 부자지간에 공유하는 일도 흔하다. 만약 이들이 아내가 아이를 낳게 되면 그녀가 처녀였을 때 가장 처음 접한 남자의 아이로 간주한다." 고도의 문명을 자랑하던 로마인의 눈에는 브리튼족이 야만인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원정하던 중에 이 브리튼.. 2024. 6. 12.
[영국]#0_해가 지지 않는 제국, 영국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유산 유럽 지도를 펼쳐보면 서유럽 대륙 건너편에 자리한 두 개의 큰 섬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그레이트브리튼이고, 다른 하나는 아일랜드다. 그레이트브리튼 섬 전체와 아일랜드 북부 및 주변 섬들을 합친 것이 바로 '연합왕국(United Kingdom)', 즉 우리가 흔히 '영국'이라고 부르는 나라이다. 북대서양의 험하고 거친 파도 가운데 떠 있는 섬나라 영국은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의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총면적은 약 24만 제곱킬로미터이며, 어떤 지방이든 해안선까지의 거리가 120킬로미터를 넘지 않는다. 17세기말에 600만 명 정도이던 인구는 오늘날에는 대략 6,800만 명 정도이다. 지도나 수치상으로만 본다면 그다지 크지 않은 나라가 어떻게 과거 .. 2024. 6. 11.
[스페인 마무리] 17세기, 유럽의 이류 국가가 된 스페인 17세기 유럽 스페인의 봉건 계급제도는 스페인 사회에 특별한 사회 풍조를 만들었다. 스페인의 많은 상인들은 큰돈을 번 후 앞다퉈 귀족 신분을 사들였다. 이를 위해 상인들은 권력자들에게 온갖 아부를 하며 돈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부자가 된 상인들은 자녀 교육을 위해 아낌없이 돈을 투자했는데, 실상 상인의 자식들은 대부분 향락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사치 풍조는 스페인 사람들은 일하기 싫어하고 놀기 좋아하는 게으른 습관에 길들게 했다. 스페인은 오랫동안 네덜란드와 독립을 저지하는 전쟁을 치렀고, 영국과의 바다의 패권 다툼을 위한 전쟁도 끊이질 않았다. 영국은 17세기 중반에 이르러 30년 전쟁을 통해 스페인을 무너뜨렸다. 1648년 유럽 각국은 30년 전쟁의 막을 내리기 위해 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했다. .. 2024. 6.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