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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2_브리타니아-로마 제국의 속주 브리타니아, 로마 제국의 속주가 되다 기원후 43년,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BC 10 ~ AD 54)는 다시 브리튼을 정복하여 로마 제국의 속주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기원전 54년에 카이사르의 군대가 브리튼 섬을 떠난 후, 거의 1세기가 다 되도록 로마는 내분으로 인해 브리튼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게다가 근 30년간이나 정복 전쟁으로 공을 세울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로마 제국 황제와 군인들은 오랫동안 참아온 정복욕을 해소할 대상이 필요했다. 이때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브리튼이었다. '브리튼 정복자'야말로 정복욕의 물꼬를 터줄 최적의 명분이었다. 그는 위대한 카이사르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이 로마 군대의 사명이라 여기고 브리튼 원정을 결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43년, 로마 군단의.. 2024. 6. 13.
[영국]#1_카이사르-브리튼 전기 카이사르-브리튼 전기 고대 로마 공화국의 통치자였던 율리우스 카이사르(BC100~BC44)는 '갈리아 전기'에서 브리튼 원주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브리튼족은 모두 대청이라는 풀을 이용해 온몸을 물들이고, 얼굴색은 특히 파랗게 보이도록 했다. 그래서 전투 중에 더욱 무섭게 느껴졌다. 또 그들은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고, 머리와 콧수염을 제외한 온몸의 털을 밀기도 했다. 특이하게도, 십여 명의 남자들이 한 아내를 공유하거나 형제간 또는 부자지간에 공유하는 일도 흔하다. 만약 이들이 아내가 아이를 낳게 되면 그녀가 처녀였을 때 가장 처음 접한 남자의 아이로 간주한다." 고도의 문명을 자랑하던 로마인의 눈에는 브리튼족이 야만인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원정하던 중에 이 브리튼.. 2024. 6. 12.
[영국]#0_해가 지지 않는 제국, 영국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유산 유럽 지도를 펼쳐보면 서유럽 대륙 건너편에 자리한 두 개의 큰 섬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그레이트브리튼이고, 다른 하나는 아일랜드다. 그레이트브리튼 섬 전체와 아일랜드 북부 및 주변 섬들을 합친 것이 바로 '연합왕국(United Kingdom)', 즉 우리가 흔히 '영국'이라고 부르는 나라이다. 북대서양의 험하고 거친 파도 가운데 떠 있는 섬나라 영국은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의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총면적은 약 24만 제곱킬로미터이며, 어떤 지방이든 해안선까지의 거리가 120킬로미터를 넘지 않는다. 17세기말에 600만 명 정도이던 인구는 오늘날에는 대략 6,800만 명 정도이다. 지도나 수치상으로만 본다면 그다지 크지 않은 나라가 어떻게 과거 .. 2024. 6. 11.
[스페인 마무리] 17세기, 유럽의 이류 국가가 된 스페인 17세기 유럽 스페인의 봉건 계급제도는 스페인 사회에 특별한 사회 풍조를 만들었다. 스페인의 많은 상인들은 큰돈을 번 후 앞다퉈 귀족 신분을 사들였다. 이를 위해 상인들은 권력자들에게 온갖 아부를 하며 돈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부자가 된 상인들은 자녀 교육을 위해 아낌없이 돈을 투자했는데, 실상 상인의 자식들은 대부분 향락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사치 풍조는 스페인 사람들은 일하기 싫어하고 놀기 좋아하는 게으른 습관에 길들게 했다. 스페인은 오랫동안 네덜란드와 독립을 저지하는 전쟁을 치렀고, 영국과의 바다의 패권 다툼을 위한 전쟁도 끊이질 않았다. 영국은 17세기 중반에 이르러 30년 전쟁을 통해 스페인을 무너뜨렸다. 1648년 유럽 각국은 30년 전쟁의 막을 내리기 위해 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했다. .. 2024. 6. 10.
[스페인] 스페인 제국의 몰락 스페인 제국의 몰락 아메리카로부터 유입된 은은 스페인에 사치성 소비를 조장했으며, 인도 무역으로 부자가 된 사람들은 스페인으로 돌아온 후 세비야에서 관직을 사고 토지와 호화로운 주택을 사들였다. 이들은 풍족한 생활을 하면서 부동산과 토지에 투자해 아메리카 무역에 필요한 자금을 모아 카리브제도 사탕수수 사업과 진주 채취 사업 등에 투자했다. 당시 세비야에는 특히 은그릇 제조업이 발달해 은 수공업자의 지위가 약재상인과 대등할 정도였다. 스페인 내에 남겨진 은은 대부분 은기 제작에 이용되었다. 네덜란드의 스페인 부대 총사령관 알바 공작이 1582년 죽을 당시 그의 집에 은접시 600개와 은쟁반 800개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스페인에서는 그가 청렴결백한 관리로 알려져 있었다. 1970년대 네덜란드.. 2024. 6. 9.
[스페인] 펠리페 2세의 죽음과 가난해지는 스페인 펠리페 2세 영면하다 펠리페 2세도 나이가 들자 궁전을 산책할 때 늘 그가 총애하던 에우헤니오에게 부축을 받아야 걸을 수 있었다. 펠리페 2세는 여전히 성실하고 엄격했지만 때때로 그를 괴롭히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오면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1596년 엘에스코리알 궁전에 매우 고통스러운 신음이 울려 퍼졌다. 늙은 왕 펠리페 2세의 병이 또다시 발작을 일으킨 것이다. 이럴 때면 그는 항상 궁전 안에 있는 가족묘로 가곤 했다. 대리석 조각상 아래 그의 아버지 카를 5세가 묻혀 있고, 그 옆에는 그의 어머니이자 포르투갈 공주인 이사벨이 잠들어 있었다. 또한 그의 세 부인도 이곳에 잠들어 있었으며 나머지 한 명인 메리 튜더는 이미 30년 전 런던에서 깊은 잠이 들었다. 펠리페 2세는.. 2024. 6. 8.
[스페인] 스페인 무적함대의 침몰 스페인의 무적함대 1588년 초, 리스본에서 영국 침공을 준비 중이던 스페인 함대 지휘관 산타크루스 후작이 고령으로 세상을 떠났다. 스페인 무적함대는 이미 리스본에 집결해 있는 상태였다. 유럽 역사상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130여 척의 스페인 함대가 모여 있는 리스본 항구의 당시 전경은 수많은 돛대가 마치 밀림처럼 보였고, 병사들과 선원들이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으며 항구에는 군수 물자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펠리페 2세는 시도니아를 함대 총지휘관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시도니아는 해전 경험이 거의 전무했기 때문에 그가 총지휘관으로 임명되자 많은 사람이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시도니아 역시 장군이었고, 병사들은 그를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스페인 함대의 계획을 이미 .. 2024. 6. 7.
[스페인]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 영국과 제해권을 둔 대립 영국 왕실이 지원한 해적, 드레이크의 등장 스페인이 네덜란드와 전쟁을 치르는 동안 영국은 스페인의 봉쇄 조치로 네덜란드와의 무역에 타격을 입었다. 1572년 안트베르펜 이남의 하류길이 막히자 영국의 양모와 방직품 수출이 어려워졌다. 지브롤터 해협에서도 스페인 함대에 가로막히자 영국 상인들과 항해사들은 새로운 시장을 찾아야 했다. 바로 이때, 호킨스, 드레이크와 같은 영국 해군 역사상 유명한 명장이 등장했다. 호킨스는 1568년 3차 아메리카 탐험 도중 배가 파손되자 잠시 멕시코에 정박했다. 그러나 호킨스는 이곳에서 스페인 총독에게 습격받아 재물을 약탈당하고 많은 영국 선원이 죽임을 당했다. 호킨스는 이때부터 스페인에 원한을 품게 되었다. 몇 년 후 호킨스는 드레이크를 파견해 스페인의 카리브해 식민지를 습.. 2024. 6. 6.
[스페인] 영국 엘리자베스 1세 즉위와 펠리페 2세 영국 신교와 가톨릭의 대립 스페인의 광신적인 가톨릭 분위기는 대외정책, 종교정책을 비롯한 펠리페 2세의 모든 통치 전략에 큰 영향을 끼쳤다. 스페인의 광신적 가톨릭은 1580년 이후 스페인 내부를 겨냥하기 시작했다. 펠리페 2세는 처음엔 신중한 통치 성향을 띠었으나 갈수록 이교도들을 심하게 핍박하면서 점점 더 잔인한 제국주의 색채가 짙어졌다. 편협하고 광적인 종교 성향을 가진 펠리페 2세는 이제 막 일어나는 신교 국가에 대해 매우 강력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1566년 스페인에서 풍요로운 영지 중 하나인 네덜란드가 가톨릭 스페인의 압제에 견디다 못해 반기를 들었다. 이것을 계기로 스페인은 네덜란드와 치열한 독립전쟁을 치르게 된다. 또한 이것은 종교적 갈등이 깊어져 가던 유럽의 신교 국가와 가톨릭 국가 간에.. 2024. 6.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