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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펠리페 2세, 스페인 국왕이 되다 펠리페 2세(재위 1556-1598)의 제국은 카를 5세의 체계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러나 펠리페 2세 때부터 스페인풍 정치가 이루어졌고 황제 주변 측근도 모두 스페인인이었다. 펠리페 2세는 국왕으로서 매우 검소하고 시간을 준수하는 등 규범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일 처리에 빈틈이 없었기에 몰인정한 면모도 보였다.  국왕의 측근들은 스페인의 이익을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고, 스페인의 왕들은 대대로 펠리페 2세를 높이 칭송하고 존경했다. 그는 집권한 20여 년간 언제나 신중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정열적이고도 치밀한 성정 때문인지 그의 통치 기간 중 스페인 국력은 최고 절정에 이르렀다.펠리페 2세의 지중해 1558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유스테 수도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기 전, 그의.. 2024. 5. 24.
[포르투갈] 남아메리카 브라질 점령기 포르투갈, 브라질을 발견하다 마젤란은 세계 일주 항해를 하면서 배를 수리하기 위해 남아메리카 브라질 해안에 여러 번 기착했다. 당시 스페인 해군력은 포르투갈을 이길 수 없었기 때문에 마젤란은 매번 포르투갈 군함의 추격을 경계해야 했다. 마젤란은 이곳에서 항상 부하들에게 포르투갈의 영토임을 잊지 말 것을 당부했다. 브라질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에서 정한 경계선 동쪽 포르투갈 범위 안에 있기 때문에 스페인 함대가 함부로 이 지역을 들어오면 안 되었다.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새로운 아메리카 점령지였다. 이곳은 훗날 포르투갈의 제2의 고향이 되었다. 1500년 3월 8일, 다 가마가 동방 항로를 발견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군함 13척으로 구성된 함대가 선원 1,200명을 태우고 테주강을 출발했다. 이들의 항해 목표.. 2024. 5. 23.
[스페인] 마젤란, 인류 최초로 세계 일주 항해를 하다 고요한 바다 태평양 카를 5세 시기, 스페인에 가장 큰 영예를 가져다준 사람은 바로 마젤란(1480-1521)이다. 그는 스페인을 위해 향료제도로 가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했고, 인류에게 새로운 세계관을 심어주었다. 마젤란은 5척의 함대로 인류 최초로 세계 일주 항해를 실현했다. 1520년 마젤란 함대는 버진곶을 경유 해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통로 마젤란 해협에 진입했다. 변덕스러운 날씨와 여러 가지 악조건 속에서 38일 동안 마젤란 함대는 작은 섬과 해구 사이를 항해한다. 다시 남아메리카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다가 운 좋게 북동 무역풍을 만났다. 마젤란 해협을 통과한 후 이들은 단 한 번도 폭풍을 만나지 않았다. 바다는 너무나 고요하고 잔잔했다.인류 최초 세계 일주 항해 16세기 초, 스페인 사람들은 이.. 2024. 5. 22.
[스페인] 피사로와 잉카 제국 두 번째 이야기 - 잉카 멸망 피사로의 금과 은을 한 방 가득 채우라는 명령이 있고 5개월간 잉카 제국의 온갖 아름다운 금은 장식품이 카하마르카 성으로 운반되기 시작했다. 피사로는 이 장식품의 예술성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성안에 단야로를 만들어놓고 각지에서 운반해 온 금을 녹여 금괴로 만든 후 공평하게 분배했다.  그러나 아타우알파와의 약속을 피사로는 지키지 않았다. 당시 상황이 아타우알파의 죽음을 재촉했기 때문이다. 이즈음 일부 잉카 원주민들이 스페인을 공격해 국왕을 구해낼 것이라는 소식이 들리는가 하면 국왕이 이미 밀지를 내려 반란을 일으킨 동생 우아스카르를 죽이라고 했다는 말들이 들려왔다.  이에 피사로와 스페인 군대는 결국 아타우알파를 죽이기로 결정했다. 피사로는 아타우알파에게 화형과 가톨릭 세례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2024. 5. 21.
[스페인] 피사로와 잉카 제국 첫 번째 이야기 - 잉카 발견 잉카 제국의 멸망 아스텍 왕국이 멸망했다. 그리고 몇 년 뒤 카를 5세는 그 소식을 코르테스로부터 직접 보고받았다. 이후 원대한 식민지 개척의 꿈을 가진 피사로가 카를 5세 앞에 나타났다. 그는 카를 5세 앞에서 자신의 포부를 당당히 밝혔다. 피사로는 1511년 발보아 원정대의 일원으로 아메리카를 탐험하면서 발보아와 함께 파나마 해협과 태평양을 발견했다. 1526년 피사로는 2명의 동료와 탐험을 떠났다. 이들은 적도를 지나 툼베스라는 도시에 도착했다. 이곳은 아메리카의 또 다른 대제국, 바로 잉카 제국의 영토였다. 영토는 안데스산맥을 따라 길게 이어져 있었는데, 그 길이가 3,500킬로미터에 이르렀다. 잉카 제국은 지금의 페루 쿠스코를 수도로 삼고 있었다. 피사로 일행은 툼베스 성에서 귀빈 대접을 받았다.. 2024. 5. 20.
[스페인] 아메리카 정복기: 아즈텍 문명의 비극 세 번째 이야기 아스텍 비극 세 번째 1519년 11월 8일, 아스텍 국왕 몬테주마가 직접 코르테스를 맞았다. 그의 뒤에는 1,000여 명의 신하들이 자신의 국왕과 스페인 정복자의 만남을 지켜보고 있었다. 몬테주마는 그때야 코르테스와 그의 신하들이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나 몬테주마는 일단 코르테스 일행에게 화려한 궁전의 일부를 내주고 귀빈으로 대접했다. 코르테스 일행은 우연히 그들이 머무르고 있는 방 벽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문의 윤곽을 발견했다. 그 벽 문을 깨고 들어가니 방 안 가득 황금 장식품들이 쌓여 있었다. 이것은 모두 국왕의 아버지가 물려준 재산이었다. 코르테스 일행은 황금을 보자 피가 끓기 시작했다. 몬테주마의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 코르테스는 아스텍의 군사들이 해안에 남아 있던.. 2024. 5. 19.
[스페인] 아메리카 정복기: 아즈텍 문명의 비극 두 번째 이야기 아스텍의 비극 두 번째 타바스코에서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던 코르테스 함대는 4일 후 아즈텍 왕국 영토에 들어섰다. 산후안데울루아에서 코르테스는 아스텍 국왕 몬테주마의 특사를 만났고, 국왕이 이들의 출현에 매우 두려워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몬테주마는 아주 특별한 전설을 믿고 있었다. 아스텍 신화에 따르면 아스텍인들이 계산하는 12년을 주기로 예전에 아스텍 영토를 지배했던 신이 나타나는데, 그 시기가 딱 맞아떨어진다는 것이다. 몬테주마는 코르테스 일행이 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이렇게 불결하고 더러운 작자들이 과연 신일까'하는 생각이 엇갈리고 있었다. 어찌 됐든 몬테주마는 코르테스 일행에게 공물을 바쳤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신의 증표와 황금이 있었다. 코르테스가 그것을 머리 위에 쓴다면 그가 분명히 .. 2024. 5. 18.
[스페인] 아메리카 정복기: 아즈텍 문명의 비극 첫 번째 이야기 황금의 땅 아메리카 1501년, 이탈리아 항해사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남아메리카 해안을 따라 2,400마일을 항해했다. 그는 이곳이 섬이 아니라 거대한 대륙임을 밝혀냈다. 독일의 지리학자 발드제뮐러는 1507년 이 대륙에 아메리고의 이름을 붙여 책자를 발행했다. 이때부터 신대륙은 '아메리카'라 불리게 되었다. 포르투갈이 진출해 있는 동방의 나라들이 눈부신 발전을 이루고 있는 데 비해 스페인이 발견한 신대륙은 1520년까지만 해도 경제적 가치가 없었다. 그러나 탐험은 계속되었다. 1520년대 이후 스페인의 유명한 식민지 개척자 코르테스와 피사로가 등장했다. 아메리카의 광활한 대륙은 얼마 지나지 않아 스페인의 새로운 영토가 되었다. 신대륙을 처음 발견한 후 유럽으로 돌아갔던 콜럼버스의 함대는 다시 카리브해로 .. 2024. 5. 17.
[스페인] 카를 5세와 오스만 제국의 술레이만 오스만제국, 술레이만의 등장 카를 5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된 다음 해 이스탄불에서는 술레이만이 술탄으로 등극했다. 유일한 왕위 계승자였던 그는 크림반도와 아나톨리아 반도의 총독으로 정치 경험을 쌓았다. 14세기에 세워진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주요 정책은 기독교 국가와의 종교전쟁이었고, 술레이만도 예외는 아니었다. 1521년 8월 술레이만은 군대를 이끌고 헝가리가 방어하고 있는 베오그라드를 점령했다. 이것은 곧 유럽 가톨릭 중심지로 가는 길목을 뚫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듬해 술레이만은 로도스섬을 점령했다. 이로써 이집트로 통하는 안전한 해상 항로를확보했고, 지중해 장악에 강한 자신감을 갖게 됐다. 1526년 8월 말 헝가리 남부의 황량한 늪지대로 헝가리 기병 수만 명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이들.. 2024. 5.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