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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포르투갈] 두 개의 나라, 하나의 왕국 스페인 펠리페 2세 vs 포르투갈 안토니오, 왕위 다툼 1579년에 열린 의회에서는 교회, 귀족, 평민 대표 10명이 모여 왕위 계승 문제를 협의했다. 그러나 이 의회에서 결론을 내기 전에 엔리케 국왕이 먼저 죽었다. 엔리케는 누구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5명의 총독이 모여 임시로 대리 통치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 중 절반 이상이 이미 펠리페 2세에게 매수당한 상태였다. 이때 포르투갈과 스페인 국경 지역에서는 스페인 군대가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펠리페 2세는 포르투갈 국민들에게 무력으로 침입했다는 이미지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의 바람과는 달리, 그의 경쟁자가 성급히 행동을 개시했기 때문에 펠리페 2세도 서둘러 군대를 움직였다. 클라투 수도원 원장 안토니오는.. 2024. 6. 4.
[포르투갈] 포르투갈, 스페인에 합병되다 세바스티앙의 죽음과 포르투갈 국왕 자리의 공석 1576년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터키의 지원을 받은 무어인들이 모로코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세바스티앙은 오스만 튀르크가 북아프리카를 손에 넣으려는 야심을 드러낸 것이라 생각했으며 이를 기독교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포르투갈은 모로코 쿠데타를 구실 삼아 대대적인 전쟁을 일으켰다.  1578년, 스물네 살의 젊은 국왕은 직접 군대를 모으고 지휘했다. 총 17만 대군이 아프리카로 향했다. 아프리카에 상륙했을 때, 한 경험 많은 노장이 해안에서 너무 멀리 떨어지지 말아야 한다고 충고했으나 젊은 국왕은 이를 귀담아듣지 않았다. 세바스티앙은 주력 부대를 이끌고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가 알카세르키비르에서 모로코 군대와 격전을 치렀다. 결국 이 전투에서 포르투갈군.. 2024. 6. 3.
[포르투갈] 인도 향로 무역 포기하고, 아프리카로 눈을 돌리다 인도를 향한 꿈, 그 막을 내리다 어떤 위기든 늘 복잡한 요인이 얽히고설켜 있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옆에서 항상 기회를 노리는 적수가 있다면 더더욱 위험하다. 포르투갈에 최초로 위기의 불씨를 남긴 왕은 바로 1557년에 서거한 주앙 3세이다. 주앙 3세가 세상을 떠나자 포르투갈 역사에 수많은 사건이 발생했다. 역사는 포르투갈 왕조 역시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왕위 계승자의 능력과 자질이 나라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주앙 3세의 뒤를 이은 왕은 손자 세바스티앙이었는데, 겨우 세 살 배기였다. 국왕이 나이가 어린 경우 보통 왕후가 섭정했는데, 주앙 3세의 왕비는 바로 신성로마 제국 카를 5세의 여동생인 카타리나였다. 국민들은 카스티야인이 포르투갈을 다스리는 것이 못마땅했기 때문에 카타.. 2024. 6. 2.
[포르투갈] 포르투갈 쇠락하다: 국내 빈부격차의 악순환 포르투갈의 추락 포르투갈이 다른 유럽 국가의 제품으로 동방 무역을 해온 결과로 영국, 네덜란드 등 기타 유럽 국가들은 상공업을 빠르게 발전시킬 수 있었다. 포르투갈이 안트베르펜에서 공산품을 대량 구매하면서 유럽 공산품 가격이 폭등하기 시작했다. 또한 향료 무역으로 큰돈을 번 포르투갈의 부자들은 생활 수준이 높아지자 계속해서 온갖 사치품을 사들였다. 포르투갈 부자들은 무기에서부터 종이, 가구, 예술품, 양탄자, 식품, 말, 수레, 선박, 화려한 실내 장식을 위한 타일, 서적, 모피, 향수 등 없는 것 없이 다 갖추어 놓고 살았다. 그러나 포르투갈의 치명적인 약점은 바로 국내 공업이 발전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향료 무역을 독점한 100년 동안 포르투갈의 공업 생산능력은 13세기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포르투.. 2024. 6. 1.
[포르투갈] 포르투갈 쇠락하다: 향료 무역의 실체 두 개의 나라, 하나의 왕국 1500년대 말 포르투갈은 해외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았지만 일하지 않는 중산층을 양산했다. 반면 농민들의 삶은 고달팠다. 교회 지주와 귀족 지주들은 도시에서의 과소비를 유지하기 위해 농민들을 더욱 핍박했다. 귀족들은 막대한 재산을 쌓았으나 발전적인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오직 편안하게 즐길 생각만 했다. 당시 포르투갈을 방문한 한 외국인 전도사는 "이곳 사람들은 어떤 고통과 굴욕을 참아낼 각오가 되어 있었지만 절대 기술을 배우려 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육체노동이란 흑인과 무어인의 몫이며 배경만 있으면 힘든 일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일하지 않는 중산층은 국가와 다른 계층의 피를 빨아먹으며 점점 더 거대해졌다. 결국 그들은 포르투갈 경제의 몰락을 가져온다... 2024. 5. 31.
[포르투갈&스페인] 아메리카와 돈키호테 저자, 세르반테스 이야기 풍요로운 땅 아메리카 아메리카로 영토를 확장한 이베리아반도의 세력은 두 개였다. 하나는 남아메리카 브라질을 통치한 포르투갈, 그리고 남쪽으로 아메리카 최남단 티에라델푸에고에서 북쪽으로는 오늘날 미국 남부 캘리포니아, 더글러스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점령한 스페인이다. 아메리카 정복 활동의 1단계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의해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반에 완성되었다. 유럽의 다른 나라들은 이 기간 내내 특별히 이들을 주시했고, 그중에서도 스페인의 종교박해와 봉건적 식민 통치는 시선을 끌었다. 이 시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누린 풍요로움은 대부분 아메리카 원주민의 노동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인디언이란 이름은 인도에서 사는 사람이란 뜻이다. 이것은 콜럼버스가 자신이 인도에서 멀지 않은 일본 혹은 중국 근처에 .. 2024. 5. 30.
[스페인] 내부로는 이슬람, 외부로는 필리핀을 점령하다 '그라나다 사건' 이슬람 무어인, 반란을 일으키다. 1492년 그라나다가 수복된 후 가톨릭에 귀의한 이슬람교도들을 모리스 코스라고 불렀다. 특히 발렌시아가 지역에 거주하는 모리스 코스들은 전체 인구의 3분의 2에 달했고 발렌시아의 영토와 경제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라나다에서는 지금도 곳곳에 이슬람 문화가 남아 있다. 그러나 지배 세력인 가톨릭교도들은 이미 개종한 이슬람교도들에게도 매우 잔혹하게 굴었다. 마음대로 그들의 재산을 빼앗고 권력을 이용해 부녀자들을 희롱했다. 천주교 신부들까지도 이러한 악행을 일삼았는데, 한마을에서는 주민 전체가 그 지역 교구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주민들은 진상 조사위원들에게 "그놈을 이 지역에서 쫓아내 버려요! 그렇게 못하겠다면 그가 희롱한 여자들을 모두 아내로 맞아야 합니다... 2024. 5. 28.
[스페인] 펠리페 2세와 종교재판소의 마녀 사냥 펠리페 2세의 정치 1560년 펠리페 2세는 스페인 수도를 툴레토에서 마드리드로 천도했다. 그리고 마드리드에서 약 30마일 떨어진 깊은 산속에 엘에스코리알 궁전을 건설했다. 이것은 그가 생캉탱 전투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이 수도원 같은 궁전은 펠리페 2세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회색빛 화강암으로 기초를 다진 엘 에스코리알은 성벽, 궁전, 교회의 기능을 모두 갖춘 복합 건축물이다. 교회 내부는 매우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지만, 외부는 엄숙하면서도 소박하고 보수적이다. 이것은 펠리페 2세의 음울한 성격과 중앙집권적 전제정치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펠리페 2세는 이곳에서 일상을 보내고 제국을 다스렸으며 죽음을 맞이했다. 펠리페 2세는 대단한 일벌레였다. 그는 국왕으로서 매우 검소하고 시.. 2024. 5. 27.
[스페인] 레판토 해전, 가톨릭vs이슬람 지중해 패권다툼 스페인 vs 오스만 제국, 지중해 패권을 장악하라 펠리페 2세의 앞길에 불운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카를 5세가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전쟁을 치른 탓에 거의 모든 유럽 국가가 재정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유럽은 잠시 휴전 상태에 들어가고 스페인도 숨 돌릴 여유가 생겼다. 또한 스페인의 지중해 맞수 오스만 튀르크 제국은 술레이만의 아들들이 왕위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이에 따라 스페인은 마음 편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1560년대 초 오스만 튀르크 해군은 대규모 해전을 치르지 않았다. 1564년 펠리페 2세는 도리아를 해군 제독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서유럽의 모든 가톨릭 국가가 오스만 튀르크와 싸울 스페인 해군을 지원했다. 1560년대 중반 스페인 해군은 무적함대라는 명성에 손색이 없었으.. 2024. 5.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