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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11_<마그나 카르타>의 이모저모(2) '마그나 카르타'에서는 다음의 세 가지 조치가 핵심적이다.첫째, 국왕이 국민에게서 돈을 얻어내는 통로를 차단한다. 즉, 국가가 함부로 돈을 징수하지 못하도록 제한 장치를 마련했다.둘째, 국왕의 판결은 공평하고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사법적 형평성을 주장했다.셋째, 지방 관리 및 제후 세력들의 압제를 없애고자 했다.'마그나 카르타'의 판본 '마그나 카르타'에는 총 4가지 판본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1215년에 작성된 문건으로 존 왕과의 타협을 통해 얻어낸 것이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존 왕은 이 협의를 무시하고 '마그나 카르타'의 무효를 주장하며 또다시 내란을 야기했다. 1216년 존 왕이 죽고 겨우 9세밖에 되지 않은 존 왕의 아들인 헨리 3세가 즉위한 뒤 새로운 '마그나 카르타'를 반포하게 된다. 그러고.. 2024. 6. 23.
[영국]#10_존 왕의 죽음과 <마그나 카르타>의 이모저모(1) 존 왕의 최후 존 왕은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할 때만 해도 이를 충실히 이행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저 시간을 벌어보려는 속셈으로 타협에 응했다. 존 왕은 재빨리 교황의 지지를 얻어 '마그나 카르타'가 불법임을 선포했다. 그러고는 또다시 내란을 일으켰다. 존 왕은 이번에도 외국 용병을 고용하여 왕궁을 지켰지만, 민심을 잃어버린 왕에게 승산은 없었다. 1216년 5월, 반란 세력은 런던에 진입했고, 누구도 국왕 편에 서는 이가 없었다. 그해 10월 18일, 막다른 길에 몰린 존 왕은 결국 병사하고 말았다. 존 왕의 일생이 실패와 좌절로 점철되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마지막 생애 1년은 왕권을 지키기 위한 그의 신념이 승리했다고 볼 수 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존 왕은 결코 '마.. 2024. 6. 22.
[영국]#9_영국 정치의 정체성을 확립한 <마그나 카르타> 마그나 카르타, 영국 정치의 정체성을 잡다 1215년 6월 15일, 템스강변의 러니미드 초원에서 존 왕과 귀족 대표 간에 담판이 벌어졌다. 그리고 여기에서 역사적으로 중대한 결과가 도출되었다. 존 왕이 국왕의 권력을 제한하고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옹호하는 문서에 조인한 것이다. 귀족들이 랭턴 대주교의 도움을 받아 작성한 이 문서에 대해 존 왕은 불만스럽기 그지없었지만, 결국 귀족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집행인 자격의 남작 25명과 함께 공동으로 서명하기에 이르렀다. 이 문서가 바로 우리에게 '대헌장'으로 알려진 '마그나 카르타'이다. 마그나 카르타 자체에는 새로운 요구사항은 없었다. 다만 윌리엄 1세 때부터 200여 년에 걸쳐 불문율로 내려온 국왕과 귀족들 간의 계약 관계를 명확하게 규정한 최초의 법률문서였.. 2024. 6. 21.
[영국]#8_왕권이 하락되고 귀족의 권한이 향상된 과정 증세 또 증세 존 왕은 잉글랜드에서 차츰 군비를 확대하고 임의로 세수를 늘리는가 하면, 귀족들의 영지를 자기 재산처럼 마음대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기존의 봉건적 규범을 완전히 무시한 처사였다. 기록에 따르면, 존 왕은 이때 병역면제세를 16배, 귀족들의 영지상속세를 100배나 올리고 동산에 대한 세금은 배로 늘렸다고 한다. 그는 또 상업세를 신설해 모든 수출입 화물의 가치에 따라 그 15분의 1을 세금으로 물리기도 했다. 교회도 더 이상 성역은 아니었다. 존 왕은 교회에까지 손을 뻗쳐 1209~1211년의 3년 동안 교회 수입에서 거두어들인 세금이 2만 8,000파운드에 달했다. 소, 양, 보리의 값도 배 이상 껑충 뛰었다. 이것이 잉글랜드 역사상 최초로 기록된 인플레이션일 것이다. 이렇듯 갈수록 .. 2024. 6. 20.
[영국]#7_실지왕(Lackland) 존, 영국의 왕이 되다 서유럽의 봉건제도 서유럽의 봉건제도는 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게르만족이 처음 실시한 제도이다. 이는 토지 분봉에 기초하여 권리와 의무 관계를 설정한 일종의 사회, 경제 제도였다. 이 제도를 통해 각 계층의 귀족들에게 토지가 분배됨에 따라 정치권력과 사법권, 정치적 특권 등도 나누어졌다. 즉, 봉건제도의 본질적인 특성은 바로 분권과 지방화인 것이다. 이 때문에 서유럽 봉건사회에서는 분열과 대립, 혼란이 끊이지 않았다. '로마 제국'처럼 강력한 통일 제국을 만들고자 했던 서유럽의 왕들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서유럽 봉건국가들의 공통점은 토지 분봉과 노역을 기반으로 한 등급제 사회이자 장원제 사회라는 것이었다. 영주와 봉신 간에는 계약 관계가 성립되었고, 각기 다른 권리와 의무를 .. 2024. 6. 19.
[영국]#6_'둠즈데이북', 더 많고 확실한 세금을 거두기 위해 토지를 정리하다 토지조사대장 '둠즈데이북' 1085년, 덴마크 국왕 크누트 2세가 잉글랜드 침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수백 년 동안 잉글랜드는 바이킹 해적들의 잦은 침략에 시달리던 불운의 땅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덴마크가 국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잉글랜드 침략계획을 포기하면서 곧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윌리엄 1세는 이 땅의 국왕으로서 해야 할 일을 생각하게 되었다. 급선무는 잉글랜드의 경제 상황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었다. 세금을 정확히 징수하여 국가와 군대가 재정 위기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윽고 영국 역사상 초유의 대규모 경제조사 작업이 개시되었다. 윌리엄은 조사위원을 파견하여 잉글랜드 전역의 도시와 촌락을 돌며 상세하게 조사하도록 했다. 특히 각급 봉신 및 자유농이 소유한 토.. 2024. 6. 18.
[영국]#5_윌리엄 1세와 솔즈베리 서약 솔즈베리 서약 잉글랜드 남부 윌트셔에 자리한 소도시 솔즈베리는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고도이다. 또한 선사시대의 거석 기념물인 스톤헨지가 발견되어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린 도시이기도 하다. 스톤헨지는 수십 톤에 달하는 무겁고 거대한 돌기둥이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는 구조물이다. 이 유적에 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누가 어떤 방법으로 건조했는지, 그리고 그 용도가 무엇이었는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인해 스톤헨지는 세계 불가사의 중 하나로 신비한 후광과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영국 역사를 좀 더 이해하게 된다면 이 소도시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이 스톤헨지 못지않은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1086년 8월 1일, 정복왕 윌리엄은 잉글랜드에서 토지를 보유한 모든 봉건 귀족을 솔즈베.. 2024. 6. 17.
[영국]#4_정복왕 윌리엄 1세 윌리엄, 잉글랜드의 왕이 되다 영국의 민간에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윌리엄은 군대를 이끌고 상륙하면서 배에서 내리다가 발을 헛디뎌 엎어지고는 오히려 "잉글랜드를 이 손안에 넣었다."라고 큰소리치며 일어났다고 한다. 그가 잉글랜드 정복에 얼마나 들뜨고 집착했는지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침략자들은 보름 동안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동쪽으로 진격하여 서식스의 헤이스팅스에 이르렀다. 이윽고 윌리엄이 이끄는 5,000명의 정예부대와 헤이스팅스의 산등성이에 진지를 구축한 7,000명의 해럴드 측 군사 간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렇게 반나절 가까이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졌다. 해럴드가 조직한 방어진이 마치 견고한 석벽처럼 큰 위력을 발휘하면서 윌리엄의 군대는 하루 종일 화살과 기병대의 공격을 번갈아 퍼붓고도 .. 2024. 6. 16.
[영국]#3_1066년, 영국 역사의 변곡점 '왕위쟁탈전' 1066년, 영국의 왕위쟁탈전 기원후 1000년이 지나면서 잉글랜드는 통일을 이루고 덴마크의 지배에서도 벗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성장할 조짐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11세기 전반기에 잉글랜드의 왕위는 빈번하게 교체되었다. 막강한 세력을 가진 귀족들은 기회만 되면 왕위를 차지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각축을 벌였다. 독실한 그리스도교였던 참회왕 에드워드(1003?~1066)는 이런 정치판에는 무관심했다. 그는 왕권에 대한 애착보다 경건한 신앙심을 더 중시했기 때문에 세속 왕국보다는 하나님의 왕국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 1066년, 참회왕 에드워드가 세상을 떠났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임종 때 웨식스 백작 해럴드를 후계자로 지명했다고도 하고, 그 훨씬 전에는 자신의 먼 친척인 노르.. 2024. 6.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