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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39_영국 부부 왕의 탄생과 영국-네덜란드 전쟁 윌리엄 3세와 메리, 영국의 부부 왕이 되다. 1688년 12월 11일 새벽, 제임스 2세는 조용히 왕궁을 떠나 아일랜드로 향했다. 하지만 가던 도중 그는 한 어부에게 발각되고 말았고, 시민들에 의해 죄인처럼 런던으로 압송되어 왔다. 난처해진 윌리엄은 사람을 보내 제임스 2세에게 18일 오전까지 런던을 떠나라는 말을 전했다. 이때 또 다른 희극이 연출되었다. 제임스 2세는 로체스터 성으로 몸을 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하루라도 빨리 왕좌에 오르고 싶었던 윌리엄은 장인과 시시콜콜 협상할 겨를이 없었다. 그는 곧바로 제임스 2세의 요청을 수락했다. 윌리엄은 런던에서 로체스터로 가는 모든 육로를 봉쇄한 것처럼 꾸몄다. 장인이 수로를 통해 로체스터로 도망가도록 해준 것이다. 로체스터에 도착한 제임스 2.. 2024. 8. 6.
[영국]#38_구교냐 신교냐, 제임스 2세냐 윌리엄 3세냐 네덜란드 총독, 윌리엄의 영국행 영국의 의회가 네덜란드의 총독 부부를 국왕으로 초청한 것은 어찌 보면 모험이었다. 위기에 직면했을 때, 영국의 군대가 다시 국왕에게 충성을 바칠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가 빌럼(윌리엄)의 군대를 가로막을 가능성도 있었다. 당시에는 네덜란드와 프랑스가 서로 등을 돌리던 상황이었다. 이 계획이 실패한다면 모두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어찌 되었든 새로운 국왕을 불러오기 위한 준비는 모두 마친 상태였다. 이제 민심을 얻기 위해 여론을 모아야 했다. 1688년 10월 초순에 영국 각 도시의 번화가, 심지어는 궁벽한 농촌 지역에까지 대량의 선전물과 전단, 벽보가 나돌았다. 국왕의 전제정치를 비판하며 신앙의 자유를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2024. 8. 5.
[영국]#37_ 영국의 '명예혁명' 명예혁명이 이루어지기까지 16세기 이후 영국에서 가톨릭은 전제왕권과의 상관관계로 인해 증오의 대상이 되어 갔다. 이런 상황에서 가톨릭교도인 제임스 2세가 영국을 통치한다는 것은 거의 재앙에 가까운 일이었다. 많은 이들이 그의 통치 방식에 불만을 품었지만, 군주제를 존중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에 빠졌다. 국민들은 국왕을 보위해야 하는데, 그 국왕은 가톨릭을 믿고, 국민들은 그 가톨릭을 증오하는 아주 난감한 상황이었다. 제임스 2세는 즉위 후 3년 동안 가톨릭 편향 정책을 서서히 강화했다. 그러다가 1688년, 그가 로마 교황의 뜻을 받들어 가톨릭 신앙의 자유를 선포하자 영국 국민들은 마침내 국왕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게 된다. 바로 제임스 2세의 사위였던 네덜란드 총독 빌럼 공에게 초청장을 보내 국왕의 자리를.. 2024. 8. 4.
[영국]#36_ 1688년,명예혁명으로 입헌군주제를 도입하다 제임스 2세는 가톨릭신자였다 제임스 2세는 곧 영국국교회와 사회 각 계층의 저항에 직면했다. 군인들조차 더 이상 국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제임스 2세가 가톨릭을 부활시키려는 시도는 영국 국민들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이미 통치력을 상실한 상태였으며, 대다수 영국인은 이 고집 센 늙은이가 하루빨리 죽고 신교도인 그의 딸 메리가 왕위를 이어받기를 염원했다. 국민들은 국왕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무력으로 왕위를 전복시키는 것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참을성 있게 기다리며 합법적인 방법으로 문제가 해결되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제임스 2세는 1만 6,000명의 군인을 런던에 주둔시키며 더욱 강력하게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정세는 급변했고, 1688년의 런던은 1642년에 영국 내전이 시작되던 때처.. 2024. 7. 28.
[영국]#35_크롬웰 이후,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가 집권한 영국 찰스 2세의 왕정복고 왕실이 다시 들어선 이후 잉글랜드는 피의 보복으로 인해 공포감이 진동했다. 찰스 1세의 처형을 주도했던 크롬웰 경과 당시 재판장이었던 브래드쇼 경은 국왕 시해죄를 선고받고 부관참시에 처했다. 그들의 무덤이 파헤쳐지고 시신은 사정없이 베어져 교수대 밑에 다시 매장되었다. 위대했던 호국경도 국왕 찰스 1세처럼 목이 잘려 나갔지만, 사후는 그보다 훨씬 더 끔찍했다. 왕당파는 부패한 시체 두 구에 광기 어린 분노를 쏟아냈다. 그들은 크롬웰의 머리를 찰스 1세가 재판을 받았던 웨스트민스터 홀 꼭대기에 내거는 것으로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을 마무리 지었다. 과거에 혁명이 고조되면서 수모를 겪었던 의원들은 이제 의회를 거리낌 없이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고귀한 의원들에게는 크롬웰에 대한 .. 2024. 7. 27.
[영국]#34_크롬웰의 생애와 크롬웰 관점으로 본 영국내전 크롬웰의 생애 1599년,  크롬웰은 잉글랜드 헌팅던의 평범한 소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2년간 수학하며 청교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는 아버지가 사망하자 대학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간 뒤 20여 년 동안 농사를 짓고 조세와 법률을 공부하며 지냈다. 이때까지 크롬웰은 전혀 영웅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그저 열 명이 넘는 식구를 먹여 살리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던 평범한 가장이었다. 1628년과 1640년에 각각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지만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영국 내전이 그의 운명을 바꿔 놓지 않았더라면, 크롬웰은 아마도 가난한 시골 지주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40세가 넘도록 단 한 번도 군인이었던 적이 없었기에 그때까지는 누구도 그에게서 군사 영웅의 기질을 발견.. 2024. 7. 26.
[영국]#33_크롬웰의 영국과 크롬웰 사후의 영국 청교도 금욕주의를 강요하다 한 영국 역사 연구가는 이렇게 지적했다. "찰스 1세가 처형당한 후, 크롬웰이 잉글랜드를 통치했다. 그는 자신을 '호국경'이라고 칭했다. 국민들의 생활방식은 예전과 아주 많이 달라졌고, 너무도 많은 것들이 변해 버렸다. 크롬웰은 국민들이 모두 청교도 방식으로 생활하기를 원했다. 크롬웰은 모든 술집과 극장을 폐쇄하고 체육활동을 금지하는 등 일련의 조치를 단행했다. 특히 크리스마스 축제를 금지하는 최악의 조처를 하면서 병사들에게 일반 가정집을 수색해 크리스마스 선물과 음식 등을 모두 압수하게 했다. 청교도가 금욕주의를 지향하는 만큼 청교도 방식의 생활은 잉글랜드를 매우 무미건조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크롬웰이 통치하는 5년 동안, 잉글랜드에는 체계적인 정치체제가 마련되었고 행정기구.. 2024. 7. 25.
[제주도][2024.07.16] 숙소에서 놀고 먹고 밤새고! (+07.17) 여행이란 자고로 갈수록 사진이 줄어드는 법17일 사진은 거의 없다봐도 무방하다물론 17일은 비행기도 가까스로 타서 뭘 할 여유따윈 없었지만 일단 대표사진으로 쓰고 싶어서 다시 한 번 투척  한 번에 다 못씻으니깐 씻을 애는 먼저 씻고나머지는 마당에서 물풍선 가지고 놀자고 했는데죄다 안 씻고 물풍선 가지고 놀아버리기~! 요즘 물풍선은 한 번에 몇 십개씩 물 넣고, 알아서 묶인다.참 좋은 세상에 살고 있어 이거 진짜 옆에서 보면 왜 저러고 놀아? 싶을 거 같은데막상하면 그냥 뭐든 재밌음 이거 끝나고 물풍선 술래잡기(?) 비슷한 거 헀는데찍어도 당최 공유를 안하니 사진, 영상을 받을 수가 없다. 끙... 저녁때메 또 장보러 가고저녁으로 또 삼겹살 구워먹었는데그 사진들은 없음. ㅎㅎㅎㅎ이번엔 밖에서 굽기만 하고.. 2024. 7. 23.
[제주도][2024.07.16] 월령포구가 그렇게 재밌더라?(+접짝뼈국 존맛) 이번 여행 최대의 고민물놀이를 어디서 할 것인가...물 무서워하는 친구들은 해변에서 놀고 싶어 하고물 좋아하는 애들은 수심 깊은 포구에서 놀고 싶어 하고.. 해수욕장 vs 판포포구오늘 점심 먹으러 가기 전까지도 계속 고민했다. 그러다 발견한 월령포구!   지도상에서 쉴만한 물가펜션 쪽 가면 앞에 이름 없는 해변이 있다.해수욕장이 아닌지라 안전요원도 없고, 경계선도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주 좋은 선택지였다.쵝오. 이번 여행+ 여태 물놀이 중에서 제일 재밌었다. 오전엔 원래 981 파크가 일정이었는데,다들 전날 밤에 슬슬 취소함.. ㅋㅋㅋㅋㅋㅋ그래서 5명만 다녀오고, 나머지는 11시까지 쉬었다. 그리고 일억조 방문!    여행객보다는 현지인이 많은 느낌(?)실은 제대로 안 둘러봤다.우연히 옆 테이블에.. 2024. 7.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