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246

[스페인]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루터, 신성로마제국을 뒤흔들다 카를 5세의 더 큰 문제는 독일의 마르틴 루터로부터 시작되었다. 1517년 마르틴 루터는 비텐베르크 교회 문 앞에 '95개 조 의견서'를 붙였다. 이것은 마치 망치로 내려치듯 로마 가톨릭교도들의 마음을 두드렸다. '95개 조 의견서'는 몇 주 지나지 않아 전 독일로 퍼져 일련의 사건을 야기했다.마르틴 루터(1483~1546)하느님은 인간에게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접근하고 은혜를 베풀어 구원하는 신임을 재발견했다. 이 결과 1517년 당시 교회의 관습이 되어 있던 면죄부 판매에 대한 비판으로 를 발표했는데, 이것이 큰 파문을 일으켜 마침내 종교 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마르틴 루터는 독일 및 로마 교회와 관련 있는 다른 나라의 기존 질서.. 2024. 5. 15.
[스페인] 카를 5세의 나폴리와 밀라노를 차지하기 위한 여정 교황과 로마 약탈 16세기 초까지 스페인이 바라보는 해양에 대한 시각은 분명했다. 아직 신대륙으로부터 금은이 끊임없이 들어오는 상황은 아니었기에 유럽 피권 쟁탈의 중심은 여전히 지중해에 있었다. 그러나 카를 5세에게 부여된 시대적 의무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그는 왕의 자리에 오른 뒤 그 방대한 영토만큼 복잡하고 다양한 정치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카를 5세가 가지고 있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라는 직함은 카를 대제 시절만큼 대단한 위력을 지니지는 못했지만, 그 영예로움은 변함없었다. 카를 5세는 독일에서 유럽과 관련된 모든 일에 주도적 역할을 해내야 했다. 당시 유럽의 강대국 구조를 보면 강력한 합스부르크 왕조가 출현해 오랫동안 유럽 대륙을 잠식하면서 매우 다양한 양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카를 5세의 .. 2024. 5. 14.
[스페인] 카를 5세; 스페인의 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다 운명적으로 대권을 거머쥔 '카를 5세' 후아나의 첫째 아들 카를 5세에게는 유전인자가 곧 유산이었다. 1500년 그가 벨기에 헨트에서 태어나 세례를 받을 당시 도시 전체는 기쁨의 도가니였다. 그의 탄생은 훗날 그의 성대한 대관식 못지않은 축제였다. 이제 막 태어나 화려한 무늬로 수놓아진 비단 강보에 싸인 갓난아이는 '룩셈부르크 공작'이란 직함을 얻었다. 수많은 기독교도, 시장, 황금 양모 기사단, 지방 영주들이 그를 추종했다. 이처럼 화려하고 웅장한 기세는 평생토록 그를 따라다니는 상징이 되었다.  카를 5세는 태어나자마자 아버지의 합스부르크 왕국을 이어받았다. 그의 할아버지가 바로 독일 황제인 막시밀리안 1세였기 때문이다. 또한 카를 5세는 스페인의 가톨릭 부부 왕의 외손자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는 스.. 2024. 5. 13.
[스페인] 이사벨 여왕의 뒤를 이은 '후아나'의 비극 1504년 무어인을 몰아내고 이베리아반도를 통일한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이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그녀의 딸 후아나가 카스티야의 왕위를 계승한다. 후아나는 사랑과 권력에 버림받은 비련의 주인공이다. 결국 그녀는 신성 로마 제국 출신의 남편 펠리페에게 왕위를 빼앗긴다. 얼마 후 펠리페는 열병에 걸려 죽고, 아들 카를 5세가 스페인 국왕 자리를 이어받는다. 이렇게 해서 카를 5세는 운명적으로 광대한 제국의 황제가 된다.비극적 삶을 살다 간 여왕 후아나 이사벨 여왕에서 그녀의 딸 후아나로 이어진 왕위 계승은 스페인이 유럽에서 지니는 위상이 어떻게 전개될지 짐작게 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이사벨 여왕이 가톨릭 왕 페르난도와 결혼할 당시 그녀는 이미 카스티야, 레온, 갈리시아, 아스투리아스, 안달루시아, 무르시아, .. 2024. 5. 12.
[포르투갈] 마카오, 나가사키까지 진출한 포르투갈 포르투갈의 아시아 진출, 마카오를 넘어 나가사키로 15세기까지 중국은 포르투갈에겐 여전히 신비의 나라였다. 그전까지는 주로 실크로드를 통해 무역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르투갈 국왕은 실크로드를 대신할 해상 항로를 개척해 중국의 상품을 리스본으로 운송할 계획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말라카는 바로 중국 무역을 위한 주요 거점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포르투갈 정부가 세케이라를 파견해 말라카를 공격하러 갔을 때 말라카의 술탄은 급히 명나라 황제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나, 명나라 무종은 술탄의 요청을 묵살하고 오히려 그를 질책하는 칙서를 보냈을 뿐이다. 16세기 중엽 포르투갈은 고리를 말린다는 핑계로 중국 마카오에 정식으로 장기 체류하기 시작했다. 또 일본 나가사키에 무역 상관을 세움으로써 포르투갈은 나가사.. 2024. 5. 12.
[포르투갈] 인도 고아, 말라카해협: 동방 무역의 거점을 만들다 알부케르크는 1509년에서 1515년까지 포르투갈의 인도 식민 정부 2대 총독을 지낸 인물로, 당시 과감하고 새로운 식민지 개척 전략을 펼쳤다. 그는 먼저 홍해의 소코트라섬을 공격하고 다시 페르시아만의 호르무즈를 점령했다. 인도에 도착한 알부케르크는 캘리컷을 공격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먼저 고아를 점령해 포르투갈의 해군기지와 베이스캠프를 세웠다.포르투갈, 무역의 요충지 말라카를 점령하라 그러나 알부케르크의 목적은 인도 동쪽에 있는 전략 요지 말라카였다. 당시 포르투갈 왕실은 향료제도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말라카 해협을 지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포르투갈은 처음부터 함대를 파견하지 않고 세케이라에게 말라카를 정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세케이라는 인도 코친 항에서 정찰선 4척을 이끌고 비밀리에 떠.. 2024. 5. 11.
[포르투갈] 인도양, 포르투갈 손에 들어가다 인도양을 지배한 포르투갈 함대 다 가마가 인도까지 몰고 간 함선에는 이동할 수 있는 최신식 대포 20여 대가 실려 있었다. 함대 포진 실력 또한 뛰어나 인도양에서 맞닥뜨린 아라비아 해군을 손쉽게 격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손바닥만 한 영토를 가진 작은 나라가 광활한 동방 세계를 지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최종 목표는 향료 무역을 독점하는 것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상권을 장악해야 했다. 이것은 훗날 수 세기 동안 식민지 개척의 주요한 수단이 되었다. 먼저 해외에 상업 거점을 세우고 뒤이어 상업 거점을 보호할 요새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현지 토착민과 물물 거래를 하다가 본토 지원군이 오면 영토를 점령하는 방식이었다. 1505년 3월 25일, 포르투갈의 무장.. 2024. 5. 11.
[포르투갈] 바스쿠 다 가마, 인도 항로를 개척하다 포르투갈의 주앙 2세 주앙 2세는 콜럼버스 항해 이전부터 육로를 통해 인도로 가는 길을 탐사하기 위해 비밀리에 탐험대를 파견하고 있었다. 1487년 디아스가 아프리카 서해안의 대서양을 따라 남하하는 동안 주앙 2세는 페드로 다 카브랄에게 육로를 통해 인도에 다녀올 것을 명령했다.페드로 다 카브랄(1467/68~1520) 바스쿠 다 가마가 인도 항로를 발견한 후 최초로 조직된 인도 파견 선단의 대장이 되었다. 1500년 3월 9일 리스본에서 출발해 희망봉을 향해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나 서쪽으로 표류하던 중 4월 22일 우연히 브라질에 도착했다. 그곳을 포르투갈의 국왕인 마누엘 1세의 영토로 선포한 후 다시 동진해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도착했고 이듬해 귀국했다. 브라질 발견자는 스페인의 M.A. 핀이지만 카.. 2024. 5. 10.
[포르투갈] 콜럼버스와 포르투갈의 주앙 2세 신대륙 발견과 동방 항로 개척 콜럼버스의 항해 이후 포르투갈의 동방 항로 개척은 유럽과 세계에 매우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항해와 개척으로 인해 사람들이 온전한 세계를 인식하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진정한 세계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콜럼버스의 항해가 위대한 평가를 받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콜럼버스의 항해로 세계 모든 대륙이 서로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고 이후 나라와 나라 사이의 무역과 문화 교류도 증가했다.주앙 2세와 인도 항로 콜럼버스의 1차 항해 성공 소식을 가장 처음 접한 왕은 스페인의 여왕과 국왕이 아니었다. 처음 콜럼버스의 요구를 거절했던 포르투갈의 주앙 2세였다. 귀항 중이던 콜럼버스는 서풍 무역대에서 태풍을 만나 어쩔 수 없이 포르투갈 항구에 기착해야 했.. 2024. 5.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