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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63(마무리)_소련 해체, 역사의 뒤안길로 가다 소련 중공업 발전의 이면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눈부시게 발전한 신기술은 공업화의 방식과 지표를 완전히 바꾸어놓았고, 생물공학, 컴퓨터, 통신 등의 기술은 경제 성장과 경쟁에 있어 엔진과도 같은 역할을 담당했다. 이 시대의 경쟁이란 단순한 군사력이나 군수 산업의 경쟁이 아닌 종합적인 국력의 경쟁을 의미했다. 핵무기를 가리켜 '종이호랑이'라고 했던 마오쩌둥의 말처럼 핵무기의 엄청난 파괴력은 그저 상징적인 위협에만 그쳤다. 매킨더는 20세기 초에 이런 말을 했다. "무장 충돌의 파괴력이 높아지고 군사력의 역할이 줄어들면 국가는 상대적으로 효율 경쟁에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소련은 이러한 국제 환경 변화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스탈린에서 브레즈네프에 이르기까지 소련 지도자들은 군사력을.. 2024. 3. 11.
[러시아사]#62_흐루쇼프를 잇는 브레즈네프와 그 당시 국제 정세 바다, 지구를 넘어 우주로 1911년, 치올콥스키는 당시로서는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예언을 했다. "인류가 언제까지나 지구에만 머물 수는 없다. 빛과 우주를 탐험하기 위해 인류는 우선 대기층을 탐측할 것이고, 그 후에는 태양계를 통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1960년대, 그의 예견은 어느 정도 현실이 되었다. 16세기에 바다를 장악했던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이 차례로 시대의 맹주가 됐던 것처럼 20세기에는 우주를 손에 넣은 미국, 독일, 소련이 차례로 시대의 주인공 자리를 꿰찼다. 20세기 중엽부터 많은 사람들이 우주 공간의 전략적 의미에 관심을 기울였고 미국과 소련은 이제 우주를 놓고 경쟁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초 케네디 대통령이 "우주를 장악하는 자가 지구를 장악할 것이다."라고 발.. 2024. 3. 11.
[러시아사]#61_소련의 군수 산업 발전과 산업 불균형 문제 군수 산업 발전과 위태로운 산업 불균형 인류는 단 한 번도 전쟁의 위협에서 자유로운 적이 없었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한 손에는 달러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원자폭탄을 휘두르며 이렇게 선언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승리는 미국인들이 세계를 끌어나갈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스탈린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전쟁하는 중에는 모두 힘을 합치는 것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적을 물리쳐야 한다는 공동의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정말 어려운 일은 전쟁이 끝나고부터 시작된다. 전쟁이 끝나면 각기 다른 이해관계 때문에 동맹이 분열되어 버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1946년 초, 미국의 상원 의원인 바루크는 "미국은 지금 냉전 상태에 처해 있다."라고 말함으로써 한 시대를 대표했던 '.. 2024. 3. 10.
[러시아사]#60_스탈린 이후 집권한 흐루쇼프와 20세기 계획 경제 20세기 계획 경제 '계획'이라는 방식이 러시아에서 탄생한 것은 아니다. 이는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쯤 생겨난 경제사상 중 하나였다. 대공황을 겪었던 미국도 계획 경제를 실시한 적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2, 3년 정도뿐이었지만 가격 통제 기관을 두어 경제 분야에서 무정부주의가 출현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처럼 경제를 하나의 틀 속에 넣을 수 있는 방법이 바로 '계획'이다. 정부는 경제의 모든 분야까지는 아니더라도 채굴이나 개발과 같은 중요한 분야는 통제하는 게 좋다. 이는 개인의 재산이 될 수 없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자연 자원은 국민 전체의 소유이기 때문에 국가에서 관리해야 한다. 계획을 세우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따라서 스탈린이 이 분야의 개척자인 것은 아니다. 그저 .. 2024. 3. 10.
[러시아사]#59_집권 후 스탈린의 적극적인 개혁 스탈린의 적극적인 개혁 레닌과 달리 스탈린은 가까운 미래에 유럽에서 혁명이 발생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1920년대에 이미 알고 있었다. 이에 스탈린은 다음과 같은 개혁을 추진했었다. 첫째, 소련을 경제 강국으로 만들려 했다. 이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소련은 이미 풍부한 자원과 인구 같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스탈린은 소련을 선진국으로 만드는 일에 가장 먼저 착수했다. 비록 1등이 되진 못하더라도 3등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식이었다. 둘째, 단일 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다. 스탈린은 아무리 강한 연맹 공화국이라도 결국 각 민족이 갖은 방법을 동원해 중앙에서 분리되려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러시아어 교육을 통해 각 민족을 융합하려 했다. 물론 모든 민족은 자신만의 언어와 문화를 가지.. 2024. 3. 9.
[러시아사]#58_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다 제2차 세계대전 종식 1943년 2월 2일, 200여 일 동안 꿋꿋하게 버틴 소련의 적군은 결국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의 승리는 소련에서의 전쟁은 물론 세계대전에서도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1945년 5월 1일은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의 승전고가 울린 날이었다. 이날 예고로프 중사와 칸타리아 중사는 독일의 제국의회 의사당 꼭대기에 붉은 깃발을 꽂았다. 그 하루 전 히틀러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나치 정권은 와해하고 말았다. 그리고 7일 후 독일은 소련의 주코프 장군에게 투항을 알려왔다. 독일이 패망한 그해 미국, 영국, 소련의 수뇌들은 얄타에서 회담을 가졌다. 이는 대국적 색채를 강하게 띠는 회담으로 세계에서 가장 힘 있는 세 개 국가가 전후 처리를 의논하는 자리였다. 이는 .. 2024. 3. 9.
[러시아사]#57_소련, 제2차 세계대전, 스탈린그라드 소련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 11월 7일은 소련의 10월 혁명 기념일이다. 하지만 1941년 11월 7일은 예전과 달랐다. 독일군이 이미 모스크바로 진격해 오는 상황이었기에 소련은 그야말로 풍전등화 신세였다. 그날 오후, 천지는 눈으로 뒤덮였고 날씨는 평소보다 더 추웠다. 하지만 시민들은 소리 높여 군가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고 있었으며 붉은 광장은 어느 때보다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밤 9시, 레닌의 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스탈린이 연설을 시작했다. "전 세계가 지금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침략자 독일의 억압 속에서 유럽인들이 우리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위대한 해방의 사명은 이제 우리들의 몫입니다. 우리는 절대 이 숭고한 사명을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미하일 쿠투조프의 용기가 우리를 일어서게 할 것.. 2024. 3. 8.
[러시아사]#56_제2차 세계대전과 소련 스탈린 집권 당시 소련의 국제 관계 정권을 잡은 스탈린은 곧바로 소련의 대외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사람들은 코민테른이 1943년에 해산됐다고 하지만 그것은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다. 코민테른의 마지막 회의는 1935년 여름에 열렸다. 그 회의에서는 아주 중요한 사안이 하나 결정됐는데, 바로 인민전선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원이었다. 즉, 더 이상의 혁명을 포기하고 반파시스트를 부르짖는 민주 세력과 함께 평화적인 수단을 통해 정권을 획득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의회 노선이다. 스탈린은 소련이 동서로부터 전쟁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온 힘을 다해 잠재적인 동맹국들과 협정을 맺고 그들과 함께 외부의 침략을 막으려 했다. 1934년, 소련은 국제연맹에 가입했다. 사실 그전까지.. 2024. 3. 8.
[러시아사]#55_대공황 이후 몰락한 자본주의 국가와 추월하는 소련 세계 대공황으로 붕괴한 자유주의 진영과 대비되는 소련의 상황 1930년대 초반,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은 미국발 대공황의 여파로 경제가 붕괴하였을 때, 사회주의 노선인 소련은 그 타격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덕분인지 소련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서방 국가가 수백 년에 걸쳐 완성했던 공업화를 이루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눈부신 발전 뒤에는 그늘진 대가가 있었다. 빠른 발전에 가려진 문제가 심각했다. 소련은 농업의 정상적인 발전을 무시한 채 중공업과 군수 산업의 성장만을 도모했기에 경제 발전의 불균형이 발생했다. 이에 따라 경제의 균형적 발전을 포기해야만 했다. 모든 경제생활을 통제한 국가가 시장 조절 작용을 무시한 탓에 나라는 강해졌지만 국민들의 생활은 여전히 곤궁했다. 이처럼 제때 해결되지 못한.. 2024. 3.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