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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교토]2월 피치항공 오사카 밤비행기, 렌터카, 호텔, 수하물, 이네 후나야 가는법 및 eDreams 예약 후기 오사카행 피치항공 예약 가격 2월 오사카 여행을 목전에 두고 있다. 12월에 예약했는데 그때도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여행지마다 내 나름의 비행기 가격이 있는데, 오사카는 20~25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에 내가 결제한 금액은 무려 40만 원이었다. 2월은 모든 여행지가 성수기여서 동남아도 55만 원이 기본으로 넘었다. 근데, 저 가격으로 예매한 항공사가 피치항공이었다. 열몇 명이 함께 가는 여행이어서 비행기 표를 서둘러 사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서둘러 구매한 편이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아시아나항공을 더 좋은 시간대로 2~3만 원만 더 비싸게 구매했다. 피치항공 시간대 / 공항 터미널 / 숙소 이번에 예약한 비행기 시간은 출발 편 비행기는 21시 출발, 22시 45분 도착이다. 귀국편 비행기는 1.. 2024. 2. 13.
[러시아사]#41_1차 세계대전과 2월 혁명, 러시아를 뒤흔들다 1913년 러시아의 석탄 생산량과 면화 가공량은 1900년에 비해 각각 121퍼센트와 62퍼센트의 성장률을 보였다. 수출 총액과 국민 소득 역시 각각 112퍼센트와 78.8퍼센트로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다. 1인당 식량 생산 역시 최대치를 기록했다. 1914년에 이르자 러시아는 세계 6대 무역 대국, 그리고 세계 4대 공업 대국으로 급부상했다. 1909년에 스톨리핀은 한껏 자랑스럽게 말했다. "앞으로 20년 동안 국내외적으로 평화 상태가 지속된다면 그때 러시아의 모습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변모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러시아에 그와 같은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미 수명이 다된 다른 왕조와 마찬가지로 러시아 역시 스톨리핀의 출현만으로는 잿빛 운명을 피할 수는 없었다. 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191.. 2024. 2. 13.
[러시아사]#40_피의 일요일 사건, 러시아 노동자들의 현실을 고발하다 피의 일요일 사건 1905년, 러시아와 일본이 중국에서 러일전쟁을 한창 벌이고 있을 때였다. 러시아 내에서는 혁명의 조짐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1월 22일 일요일, 새벽부터 눈보라가 휘날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15만 명의 노동자와 그들의 가족이 노인과 아이들을 대동하고 나와 겨울궁전을 향해 평화 행진을 시작했다. 그들은 청원서와 니콜라이 2세(재위 1895-1917)의 초상화를 들고 동방정교의 찬송가를 부르며 국민 대표제, 8시간 노동권, 의무 교육, 임금 인상, 작업 환경 개선 등을 요구했다. 하지만 손에 무기 하나 쥐지 않은 그들을 기다린 것은 황제의 웃는 얼굴이 아니라 총성과 차디찬 말발굽 소리뿐이었다. 경찰과 군대는 이 평화적 행진에 발포를 시작했고, 그날 상트페테르부르크 거리는 노동자의 피로 .. 2024. 2. 12.
[러시아사]#39_알렉산드르 2세 암살과 레닌의 탄생 알렉산드르 2세 암살 농노를 해방한 알렉산드르 2세는 '해방 황제'라고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전제 군주였다. 농노를 해방한 것은 자신의 통치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그의 진심은 독일 철혈재상인 비스마르크와의 대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황관은 내게 권력의 달콤함을 주었소. 이 황관을 잃는 것은 나의 국민과 민족의 재난을 의미하는 거요." 상황이 어느 정도 좋아졌다고 생각한 그는 더 이상의 개혁을 거부했다. 그는 막 싹트고 있는 악의 유혹에서 러시아인들을 보호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유혹이 언젠가는 사회의 재난을 몰고 올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대내적으로는 한발 더 나아간 개혁을 원하는 이들을 최고 치안위원회를 통해 공격함으로써 유혈 진입했으며, 대외.. 2024. 2. 11.
[러시아사]#38_러시아 농노제 폐지, 경제 현대화에 이르다 농노제 폐지되다 차르 정부의 일부 인사들까지도 러시아가 너무도 오랫동안 농노제를 유지해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이를 폐지하지 않으면 수십 년 후에는 러시아 전체가 무너질 수 있음을 조심스레 지적했다. 1861년, 마침내 러시아를 곪게 한 농노제가 끝을 맺었다. 알렉산드르 2세가 농노제 폐지를 법적으로 선포한 것이다. 이제 러시아는 서유럽에 뒤처진 지 100년 만에 마침내 현대화로의 발걸음을 내디뎠다. 농노들은 자유를 얻었고 지주들은 더 이상 농노들을 사고팔 수 없었다. 하지만 모든 토지는 여전히 지주들의 소유였기 때문에 농민들은 실제 토지 가격의 2~3배가 넘는 배상금을 지불해야만 토지를 얻을 수 있었다. 해방된 농민들이 공장에 노동력을 제공하고 거액의 배상금이 공업 발전 자금으로 사용되면서 수공업 공장.. 2024. 2. 10.
[러시아사]#37_농노제, 러시아 발전의 발목을 잡다 러시아의 발목을 잡는 농노제 유럽의 산업혁명으로 인해 러시아는 이내 영국, 프랑스 같은 국가에 뒤처지고 말았다. 러시아는 거대한 파도와도 같은 산업혁명에 직면해서도 수동적이고 느릿느릿한 태도를 보였다. 무엇보다 농노제는 러시아 산업화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어버렸다. 영국과 프랑스를 상대로 한 크림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봉건 농노제의 패배를 상징했다. 이로써 러시아는 유럽에서의 모든 패권을 잃어버렸다. 러시아 역사상 가장 뼈아픈 패배였다. 고질병 같은 농노제는 점점 러시아의 활력을 빼앗아 갔다. 러시아의 정치계는 뇌물과 부패가 성행했고, 아무렇지 않게 국고에 손을 대는 이가 있는가 하면 벌건 대낮에 뇌물을 주고받는 이들도 있었다. 한 번은 니콜라이 1세가 군관을 시켜 당시 추진되던 공사의.. 2024. 2. 9.
[러시아사]#36_니콜라이 1세의 그릇된 야심과 낙후된 러시아 니콜라이 1세의 그릇된 야심과 낙후되는 러시아 알렉산드르 1세의 계승자라 자처하던 니콜라이 1세(재위 1825~1855)는 데카브리스트의 난을 진압하며 자신의 강경 통치에 무척이나 만족했다. 유럽 사회에 변화의 기운이 감도는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눈치채지 못했던 니콜라이 1세는 자신을 '유럽의 헌병'으로 칭했다. 엥겔스는 니콜라이 1세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는 자아도취에 빠져 있었다. 그의 시야는 끝까지 일개 군관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잔인함을 의지의 표현이라 착각했으며 독단적인 집정을 힘의 상징이라 믿었다." 1848년, 프랑스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났고 이에 따라 제2공화정이 수립됐다. 니콜라이 1세는 마침 궁정 무도회에 참가했다가 그 소식을 듣게 되었다. 스스로 유럽의 헌병이라 여겼.. 2024. 2. 8.
[러시아사]#35_데카브리스트 실패와 그후 러시아 지식인들의 긍지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뉜 데카브리스트 데카브리스트들은 서유럽 국가 문명에 완전히 부합하는 사회 제도를 실현하려 했다. 그들은 러시아가 매우 낙후되어 있으며 농노제와 군주제가 조국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두 가지 방식의 혁명을 제안했다. 온건파는 계몽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서양 제도를 들여와 천천히 농노제와 군주제를 폐지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강경파는 더욱 강력한 방식을 원했다. 그들은 무장 쿠데타로 황제와 황족들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해야만 러시아에 공화국을 세우고 의회를 수립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당시 신하들로부터 데카브리스트들이 농노제를 폐지하고 군주의 권한을 제한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알렉산드르.. 2024. 2. 6.
[러시아사]#34_데카브리스트와 관련된 몇몇 이야기(데카브리스트 광장과 로맨스) 데카브리스트 광장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유명한 광장이 있다. 참정원 광장이라 불렸던 이곳은 훗날 청동 기사 동상이 세워지면서 표트르 광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곳을 데카브리스트 광장이라 부른다. 바로 1825년 황제의 통치를 거부하고 농노 해방을 부르짖었던 데카브리스트를 기념하기 위해서다. 1825년 12월 14일, 데카브리스트 광장에서 울려 퍼졌던 총성과 포성, 그리고 말발굽 소리와 비명은 러시아의 심장을 뒤흔들었다. 이곳에서 1,261명의 혁명 참가자들과 국민이 목숨을 잃었으며 그 피가 러시아 땅을 적셨다. 1925년 데카브리스트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면서부터 지금까지 이곳을 데카브리스트 광장이라 부르고 있다. 시베리아에서 피어난 데카브리스트의 로맨스 여담 데카브리스트들의 운명은 그렇.. 2024. 2.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