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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33_데카브리스트의 난, 러시아의 귀족 혁명 시기 전제 군주제와 농노제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다 프랑스혁명의 결과를 직접 목격한 러시아 귀족들은 더 이상 러시아의 현실을 두 눈 뜨고 바라볼 수 없었다. 프랑스의 평민들이 부활한 부르봉 왕조의 귀족들에게 평등과 자유를 요구할 때 러시아의 농노들은 여전히 귀족 지주의 채찍 앞에서 벌벌 떨어야만 했다.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의 불길이 30년 동안이나 지속되고 있었지만, 러시아는 근대적인 공장조차 몇 개 갖추지 못한 채 여전히 수공업으로 생산하고 있었다. 유럽 세계에서 의회제가 보편적으로 인정될 무렵 미국은 이미 대서양 건너편에서 공화국을 수립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여전히 군주 독재를 유지하고 있었다. 계몽 군주는 이미 당위성을 잃었고 두 대제의 개방 정책으로 인해 러시아 국민들 사이에는 진보에 대한 바람이 거세게 .. 2024. 2. 5.
[러시아사]#32_쿠투조프의 일생과 러시아에 찾아온 자유주의 쿠투조프 장군의 일생 쿠투조프는 예카테리나 2세, 파벨 1세, 알렉산드르 1세, 모두 세 명의 황제를 섬겼다. 험난하면서도 찬란했던 그의 일생은 모두 이 세 명의 군주와 관련이 있다. 게다가 그의 인생은 군주에 따라 극과 극을 달렸다. 그가 처음으로 전쟁에서 다쳤을 때 그가 소속됐던 부대의 총사령관은 예카테리나 2세에게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모스크바 군대의 부상자 중 쿠투조프라 불리는 중위가 있습니다. 그는 새롭게 조직된 부대를 통솔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나 노련한 군인들을 능가할 정도입니다." 그러자 여제는 쿠투조프에게 1만 루블의 상금을 하사했으며 직접 의사를 찾아가 이렇게 부탁했다. "반드시 쿠투조프의 부상을 낫게 해야 해요. 그는 큰 장군이 될 인물이에요." 쿠투조프는 용맹했을 뿐 .. 2024. 2. 5.
[러시아사]#31_나폴레옹의 패배, 러시아의 위세를 높이다 나폴레옹 참패하다 1812년 10월 19일, 나폴레옹은 결국 러시아에서 철수를 결정한다. 원래 나폴레옹의 계획은 계속 남하해 칼루가를 차지하는 것이었지만 이미 두 번이나 쿠투조프에게 패했기에 어쩔 수 없이 이미 프랑스군에 의해 폐허가 된 스몰렌스크 거리에서 후퇴해야만 했다. 쿠투조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후퇴하는 나폴레옹을 군대를 조직해 반격하기 시작했다. 프랑스군은 대열도 갖추지 못한 채 허둥거렸고 남은 인원들은 베르지나 강에서 다시 한번 공격을 당한 뒤 허겁지겁 국경으로 도망쳐버렸다. 쿠투조프의 재빠르고 시기적절한 전술은 무적이라 여겨지던 나폴레옹의 대군을 이렇듯 가볍게 격파했다. 이처럼 전세가 역전되자 러시아 병사들은 "러시아의 구세주 만세!"라며 쿠투조프를 소리 높여 찬양했다. 그러나 쿠투.. 2024. 2. 4.
[러시아사]#30_나폴레옹, 쿠투조프, 보로디노 전투와 모스크바 입성 나폴레옹 러시아를 집어삼키다 1812년, 나폴레옹이 5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향해 진격했다. 얼마 후 러시아의 도시는 차례차례 나폴레옹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이때 러시아 전역에서 한 사람의 이름을 외쳤으니, 바로 쿠투조프였다. 병사들은 소박하고 용감한 장군 쿠투조프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존경해 마지않았다. 군관들은 대단한 지략을 갖춘 그를 신뢰할 만한 지도자라고 여겼으며 종교계에서도 그를 종교를 존중하는 성실한 신도라 평가했다. 귀족들 역시 그가 누구보다 조국을 사랑하는 진정한 러시아인이라고 입을 모아 칭찬했다. 이렇듯 대부분의 러시아인은 쿠투조프를 러시아의 구세주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이미 퇴역한 쿠투조프는 나폴레옹 침략 소식을 듣자마자 전투복을 갖춰 입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달려갔다. 자신을 부.. 2024. 1. 31.
[러시아사]#29_러시아 영웅 쿠투조프와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러시아의 영웅, 쿠투조프 1813년 4월 28일 아침 9시 35분, 분츨라우(지금의 폴란드)라는 작은 도시의 이층 집으로 별똥별 하나가 떨어졌다. 8년이 지난 1821년 4월 11일, 이 도시에는 쇠로 만든 높이 12미터의 기념비가 올라섰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쿠투조프 스몰렌스크 공작, 무적의 러시아 군대를 이끌고 이곳에 오다. 죽음의 신은 그의 영광스러운 대업을 중단시키고 말았지만 그는 조국을 구했으며 유럽에 자유의 길을 열어 주었도다. 그의 이름은 영원하리니!" 쿠투조프(1745-1813)는 군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12살이 되던 해에 구사 학교에 들어갔으며, 타고난 총기로 금세 학생들 사이에서는 두각을 나타냈다. 이러한 배경은 훗날 그가 세계에서 가장 박학다식한 군인 중.. 2024. 1. 31.
[러시아사]#28_예카테리나, 표트르의 공통적 면모와 농노제 예카테리나와 표트르의 공통점과 차이점 1720년대~30년대, 러시아는 발전을 계속하기는 했지만, 발전 속도가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여러 분야에 많은 장애물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때 예카테리나 2세가 표트르의 대업을 계승했다. 표트르 대제가 발트해 연안의 영토를 손에 넣는 임무를 완성했다면 예카테리나 2세는 표트르가 이루지 못했던 두 번째 문제인 흑해를 러시아의 영역권으로 만드는 임무를 완수했다. 예카테리나는 크림반도에서 대립 구도를 이루던 오스만 제국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 일에 예카테리나는 적지 않은 시간과 힘을 쏟았다. 한편으로 여제는 국가 질서를 강화하는 데도 노력했다. 귀족 계층에 힘을 싣고, 군대의 힘을 강화했으며, 산업과 경제, 문화의 발전을 추진해 나간 것이다. 그녀는 표트르 대제의.. 2024. 1. 30.
[일본 근현대사]#59(마무리)_어느 노벨 문학상 수상자의 고백, '애매한 일본과 나' 오에 겐자부로의 고백 수상 소감에서 오에 겐자부로는 이렇게 말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그 연설은 매우 아름다웠지만, 매우 애매하게 느껴졌다." "솔직히 말해, 난 26년 전 이 자리에 섰던 동포보다도 71년 전 수상자인 아일랜드의 대시인 예이츠에게 더 친근감을 느꼈다. 그는 파괴적이고 맹목적인 신앙 속에서 인류의 지혜를 수호했기 때문이다." "나는 문학과 철학을 통해서가 아니라 전자엔지니어링 학과 자동차 생산 공정학을 통해 세계에 알려진 우리나라의 문명을 위해 예이츠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한 파괴적이고 맹목적인 신앙이 우리나라는 물론 주변 국가 사람들의 이성을 짓밟았다. 나는 바로 이러한 역사를 가진 국가의 국민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자국의 역사로 인해 고통스러운 .. 2024. 1. 30.
[일본 근현대사]#58_정치 선진국은 될 수 없는 일본, 야스쿠니 신사 참배 정치 대국을 향하여 1983년 1월 24일, 나카소네 야스히로 일본 총리는 국회 시정 연설에서 유명한 '전후 정치 총결산'을 제시하고, "일본이 전후 역사상 중대한 전환점에 놓였다.", "과거의 기본 제도와 구조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재인식해야 할 때가 되었다."라고 천명했다. 그는 또 고향인 군마현에서 열린 연설회에서도 "앞으로 세계 정치에서 일본의 발언권을 강화하고, 경제 대국으로서의 비중을 높이는 한편, 정치 대국으로서의 입지를 강화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1984년 7월, 가루이자와에서 열린 자민당 세미나에서도 "21세기를 대비해 과거 의견이 분분했거나, 계속 회피해 오던 문제에 대해 과감히 논의하고, 통일적인 견해를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 그래야만 일본이 정정당당하게 세계 무대로 진출하여.. 2024. 1. 29.
[일본 근현대사]#57_세계 2위의 경제 대국, 그 거품이 터지다 세계 제2위의 경제 대국이 되다 이케다 내각이 집권하던 1963년, 일본의 GDP는 676억 달러로 같은 시기 미국의 11.4퍼센트, 서독의 70퍼센트, 영국의 78퍼센트에 달했으며, 1966년까지 실질적인 경제 성장률이 13퍼센트를 기록해 일본은 전체 GNP 규모가 미국과 독일, 영국, 프랑스에 이어 세계 5위를 차지했다. 메이지 유신을 실시한 지 100년째 되던 1968년, 일본의 GNP가 서독을 앞질러 1위인 미국의 바로 뒤를 잇는 2위로 올라섰다. 당시 일본의 국민 소득은 여전히 세계 20위에 머물러 일본인들의 생활이 '세계 제2위 경제 대국'의 국민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였지만, 주요 산업의 국제 경쟁력은 매우 강했다. 일본 경제는 국민 경제의 활력과 고성장률, 낮은 실업률, 안정된 물가를 무기.. 2024. 1.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