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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51_종전 후 미국의 일본 경제, 교육, 헌법에 대한 개입 신헌법에 의해 의회와 내각 그리고 지방 자치 제도에 대한 개혁도 기본적으로 이루어졌다. 재벌들은 해산하라, 미국의 경제 개입 경제 분야에서는 일본 군국주의를 지탱하던 주요 기반으로서 기생하던 지주 토지 소유제를 개혁해 경작자가 토지를 소유하는 자경농 제도로 변모했다. 연합군 총사령부는 일본 군국주의의 대외 확장에 경제적 기반을 제공했던 재벌을 해산시켰다. 당시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 야쓰다 등 10대 재벌이 소유한 기업의 총자산은 전체 기업 총자산의 35퍼센트, 금융자산의 53퍼센트, 중화학 공업의 49퍼센트를 차지했는데, 미국은 조사 보고서를 통해 "일본에서 재벌이 계속 존재한다면 이 나라는 곧 재벌의 나라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 미국은 지주 회사를 해산시키고, 재벌 가족의 통치권을 취소한다... 2024. 1. 24.
[일본 근현대사]#50_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 전후처리 1945년 8월 30일, 연합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가 일본에 도착했다. 그는 향후 5년간 일본에서 '태상황'의 지위를 누린다. 미국의 일본 점령 9월 2일, 도쿄만에 정박 중이던 미국 전함 미주리호에서 항복 조인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미국, 영국, 중국, 소련, 네덜란드 등 각국 대표가 지켜보는 가운데, 일본 시게미쓰 마모루 외상과 우메즈 요시지로 참모총장이 정식으로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맥아더는 황궁을 내려다볼 수 있는 도쿄의 중심 다이이치 생명 빌딩에 사령부를 설치했다. 9월 27일, 일본 히로히토 천황이 맥아더를 방문했다. 천황이 미국 대사관에 도착했을 때, 미국 사진기자가 히로히토와 맥아더가 나란히 서 있는 장면을 사진 찍었다. 이 사진이 일본 신문에 실린 후 일본이 발칵 뒤집혔다. 일본 .. 2024. 1. 23.
[일본 근현대사]#49_두 개의 원자폭탄과 일본의 무조건 항복 1943년부터 일본은 일본 본도에서 쿠릴 열도, 오가사와라 제도, 이오지마, 마리아나 군도, 필리핀 군도,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 및 인도양의 안다만 제도로 이어지는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 방어선의 바깥쪽에는 라바울, 솔로몬 섬 중부, 뉴기니섬 중부와 마셜 제도가 있었다. 미국의 진격, 밀리는 일본 일본은 중국군과 관동군, 조선군을 신속하게 태평양으로 파견했지만, 미국의 빠른 공격과 압도적인 자원 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12월 말, 일본 해군은 솔로몬 군도에서 철수하였으며, 뉴기니에 있던 13만 일본군이 고립되었다. 일본은 마리아나 군도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1944년 6월, 미군의 대형 함대가 사이판으로 접근해 마리아나 군도에 있는 주요 일본 기지를 공격하기 시작하자, 일본은 항공모함 9척과 .. 2024. 1. 23.
[일본 근현대사]#48_일본의 진주만 공습과 태평양전쟁 일본은 대동아 공영권에 기반한 기본 국책 강요를 제정하면서 프랑스 정부와도 협정을 맺었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베트남 북부로 진격하고서, 독일, 이탈리아와 3국 동맹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세계를 분할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2차 세계대전의 추축국, 3국 동맹을 맺다. 이 조약을 통해 일본은 유럽의 새로운 질서에서 독일과 이탈리아가 갖는 주도적 지위를 인정했고, 독일과 이탈리아는 대동아의 새로운 질서 구축에 있어서 일본의 주도적인 지위를 인정하기로 했다. 이 조약은 3국과 소련의 정치적 관계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지만, 중일전쟁과 유럽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제3 국'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경우 모든 수단을 동원해 지원할 것을 약속했다. 이 조항은 바다 건너에서 고립주의를 유지하고.. 2024. 1. 22.
[일본 근현대사]#47_난징 대학살과 태평양전쟁 발발 1937년, 표면적으로는 중·일 관계가 매우 평온한 것처럼 보였지만, 4월부터 일본군이 핑진(현재 베이징과 톈진) 근교에서 군사훈련을 시작하였으며, 6월에는 펑타이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내부에서 군대의 이동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었다. 난징 대학살, 일본 군국주의의 광기 일본 도쿄 정치계의 소식통 사이에서는 칠석날 밤에 화베이에서 9.18 만주사변과 같은 사건이 재연될 것이라는 풍문이 떠돌았다. 같은 해 7월 초, 일본 천황 히로히토와 육군대신 스기야마 하지메가 중일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천황이 소련 군대가 걱정이라고 말하자, 스기야마 하지메는 "중국과 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2~3개월이면 해결될 것입니다."라고 호언장담했다.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부근에서 일본군과 중국군이 충돌한 .. 2024. 1. 22.
[일본 근현대사]#46_일본의 만주사변과 중국의 국공합작 1931년 9월 18일, 중국 선양 북부 류탸오거우에서 관동군 독립수비대의 고모토 스에모리 중위가 사병 6명을 데리고 남만 철도 선로 위에 황색 폭약 42포를 설치했다. 얼마 후 굉음과 함께 철로가 폭파되었다. 이 일은 중국 군대를 모함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었다. 9.18 만주사변 얼마 후, 4킬로미터 밖에 매복해 있던 카와시마 타다시 대위가 중국 군대에 공격을 퍼부었다. 이는 일본군이 이미 오랫동안 준비해 온 대규모 행동으로, 중국 동북부를 점령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9월 19일, 안둥, 잉커우, 창춘, 펑황청이 일본군에게 점령당했다. 장제스의 훈령에 따라 장쉐량은 저항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관리들은 자기들 목숨 부지하는 게 최우선이어서 도망가기 바빴다. 불과 4개월 동안 일본은 산해관.. 2024. 1. 17.
[일본 근현대사]#45_대공황과 군국주의 길을 걷는 일본 1921년, 미국 정부가 일본,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중국 등 9개국을 초청해 워싱턴에서 회의를 열고, 일본에 강한 공세를 펼쳤다. 미국은 일본에 해군의 군비 확장을 제한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미국과 영국, 일본이 각각 5:5:3의 비율을 유지하기로 합의해, 일본 주력 군함의 규모는 영국과 미국보다 21만 톤 적은 31만 톤을 넘을 수 없게 되었다. 중국 문제에 있어서 미국은 문호 개방과 기회균등의 원칙을 내세웠다. 그러나 중국이 요구한 영사 재판권 취소와 관세 자유 실현, 조계지 반환 등의 요구와 산둥 문제 해결, 1915년에 체결된 21개조 요구 폐지 등의 조건은 일본이 배상금을 받고 산둥에서 철군하기로 합의하는 데 그쳤다. 워싱턴 회의를 계기로 동북아에 새로운 정치 국면이 형성되었다. 영일 .. 2024. 1. 17.
[일본 근현대사]#44_제1차 세계대전 후, 중국의 산둥반도를 차지하다 1914년 10월 말, 일본 군대가 갑자기 중국 칭다오에 주둔해 있던 독일군에게 총공세를 가했다. 이 전투에 영국군 1,000명도 참가했다. 11월 7일, 칭다오의 독일군이 투항함으로써 일본군이 칭다오를 관리하고, 독일의 전쟁 포로들은 도쿄 전쟁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속 일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유럽에서 시작되었다. 유럽 협약국과 동맹국이 참전했는데, 안팎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일본 정치계는 이 전쟁에서 한 줄기 빛을 봤다. 원로 이노우에 가오루는 "이 전쟁은 다이쇼 시대의 천우이다."라고 외쳤다. 일본 정부는 곧 참전 준비에 착수했다. 전쟁이 일본 경제에 큰 이익을 안겨줄 뿐만 아니라, 아시아에 대한 열강의 간섭이 줄어든 틈을 타 동북아에서 본인들의 지위를 강화할 절호의.. 2024. 1. 16.
[일본 근현대사]#43_일본, 조선을 삼키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 조선을 삼키다 1905년 11월 16일,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을 방문해 '한일 협약(을사늑약)'을 고종에게 전달한다. 그리고 일본에 외교권을 넘겨 달라고 공공연하게 요구했다. 그는 외무대신을 만나 서둘러 일본 공사와 협약을 체결할 것을 강요한 뒤, 18일 새벽 0시 20분 일본 헌병들의 경호를 받으며 거처에 도착했다. 약 30분 뒤, 주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조선의 박제순이 한일 협약에 서명했다. 일본은 조선에 통감을 설치하고 주둔해 외교를 총괄하도록 했다. 이로써 조선은 일본의 동의를 받지 않고는 그 어떤 국제 협약도 체결할 수 없는 처지로 전락한다. 1906년,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조선 통감으로 부임한다. 그는 한국을 13도 11부 333군으로 나누고 각급 행정 기관에 .. 2024. 1.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