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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42_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 본심을 보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독일에 도착했을 때, 러시아로부터 그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일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리고 바로 이때 영일 협상이 진전을 거두어, 이토 히로부미는 곧장 영국으로 가서 군사 동맹을 체결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가 한반도를 손에 넣는 것을 절대로 좌시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러일전쟁 발발 영일 동맹이 러시아를 압박하자, 러시아는 같은 해 청나라와 조약을 체결하고, 1년 반 동안 세 차례에 걸쳐 자국의 군대를 철수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1903년, 러시아가 갑자기 철군에 대한 새로운 조건을 내걸었다. 동북 3성을 점령하는 것 외에도 외몽골과 중국 북부 지역 전체를 자국의 영향권 내에 두겠다는 것이었다. 이때 일본은 러시아에 강하게 반대하도록 청나라 정부를 부추겼다. 일.. 2024. 1. 15.
[일본 근현대사]#41_중국의 의화단 운동과 러일전쟁의 조짐 [일본 근현대사]#40_일본의 청일전쟁 승리, 시모노세키 조약 [일본 근현대사]#39_청일전쟁 발발. 일본, 조선을 탐내다 구미 각국과의 불평등 조약을 수정하기 위해 제1대 이토 히로부미 내각의 외상 이노우에 가오루가 무쓰 무네미쓰의 계책을 받아들여 도 readmyworld.tistory.com 일본은 프랑스, 독일, 러시아의 3국 간섭으로 랴오둥반도를 중국에 돌려주자, 더욱 특이한 병태적 심리에 빠져 군국주의의 바람이 점점 드세졌다. 이른바 '와신상담'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전 국민에게 러시아와의 전쟁 준비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고 전후 처리에 주력한다. 그로부터 10년 후, 일본은 러시아와 중국, 조선에서 피비린내 나는 학살의 러일전쟁을 일으킨다. 중국의 의화단 운동과 일본 시모노세키 조약은 일본 입장에.. 2024. 1. 15.
[일본 근현대사]#40_일본의 청일전쟁 승리, 시모노세키 조약 [일본 근현대사]#39_청일전쟁 발발. 일본, 조선을 탐내다 구미 각국과의 불평등 조약을 수정하기 위해 제1대 이토 히로부미 내각의 외상 이노우에 가오루가 무쓰 무네미쓰의 계책을 받아들여 도쿄에 로쿠메이칸(메이지 시대 외국인 접대소)을 건립하고 readmyworld.tistory.com 청은 이미 더 이상 싸울 힘이 없었고, 일본도 열강의 간섭으로 이미 확보한 이익을 빼앗기지 않을까 조마조마하고 있었다. 청나라가 장인환과 사오여우롄을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을 히로시마로 보냈다. 그러자 이토 히로부미는 그들이 전권을 위임받지 않았다는 것을 핑계로 그들을 돌려보내고 이홍장이 직접 협상에 나설 것을 요구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다 1895년 3월, 이홍장이 일본 시모노세키에 도착해 .. 2024. 1. 13.
[일본 근현대사]#39_청일전쟁 발발. 일본, 조선을 탐내다 구미 각국과의 불평등 조약을 수정하기 위해 제1대 이토 히로부미 내각의 외상 이노우에 가오루가 무쓰 무네미쓰의 계책을 받아들여 도쿄에 로쿠메이칸(메이지 시대 외국인 접대소)을 건립하고 서양 인사들을 초청해 연회를 열어 일본 서구화의 성과를 보여주었다. 1883년 준공된 로쿠메이칸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는데, 당시 일본의 주요 정치인과 외국 사절들이 연회를 열고 친분을 다지는 장소가 되었다. 그 와중에 이토 히로부미는 주색을 일삼으며 음탕한 본색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 시기를 일본인들은 '로쿠메이칸 시대'라고 부른다. 그러나 조약 수정을 위한 비밀 협상은 순조롭지 않았다. 이노우에 가오루가 협상에 실패하자, 오쿠마 시게노부가 그 뒤를 이어 협상을 진행했다. 그런데 협상이 거의 타결되려는 때에 영국의 '타임.. 2024. 1. 12.
[일본 근현대사]#38_조선, 중국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는 일본 1879년 3월, 일본은 류큐를 오키나와현으로 이름 바꾸고 자국 영토로 편입하는 데 성공했다. 6월에는 류큐 국왕 쇼타이와 왕실 구성원들을 도쿄로 압송해 류큐 왕국을 정식으로 합병했다. 이제 다음 목표는 조선이었다. 일본의 조선에 대한 야욕 이후 일본은 북상과 남진을 동시에 진행했다. 그래서 북으로는 조선을 손에 넣고, 만주와 몽골을 침략한 후엔 중국 전역으로까지 손을 뻗친다. 남으로는 타이완을 점령한 후 동남아에 진출한다. 이 둘 중에서 일본은 북상에 더욱 주력해 훗날 대륙 정책까지 수립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전략은 이미 메이지 유신 이후부터 차근차근 실시된 것이었다. 1876년, 일본은 조선과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의 목적은 조선 침략뿐만 아니라, 조선이 중국의 영.. 2024. 1. 11.
[일본 근현대사]#37_일본, 국외 영토를 탐내기 시작하다. 아시아를 넘어 유럽에 진출해야 한다는 사상은 일본을 군국주의 침략 노선으로 인도했다. 그 후 일본은 반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열강의 후발주자이자 아시아의 돌연변이로서 특유의 야만성과 흉포함으로 수많은 아시아 국가를 침략하였으며, 수천만 아시아인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일본의 피비린내 나는 흥성은 인류 역사에 치욕스러운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여러 아시아 국가는 그때 입은 상처가 오늘날까지도 모두 아물지 않아 여전히 일본을 경계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게다가 일본이 지난 역사에 대해 애매하고 잘못된 태도로 일관하고 있어 아시아 국가들과의 사이에 깊이 팬 심리적인 골이 메워지지 못하고 있다. 아시아를 넘어 유럽으로, 탈아론 1885년, 일본 사상계의 아버지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자신이 운영.. 2024. 1. 11.
[일본 근현대사]#36_메이지 헌법, 향후 일본 파시즘의 근원이 되다 제국 헌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천황과 군대에 관한 규정이다. 이것은 일본이 침략 전쟁을 도발하도록 하여 아시아와 세계에 크나큰 재앙을 안겨주었다. 결국 일본 제국을 철저히 패망시킨 원인이기도 하다. 헌법 규정에 따르면, 육·해군의 통솔과 편제 그리고 병력을 결정하는 권한은 순전히 천황에게 있고 의회나 내각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군대 통솔권이 독립적이고 군부가 천황의 직속 기관이기 때문에 군부의 권력이 막강해 심지어는 내각과 의회를 좌지우지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천황의 자문기관인 원수부와 군사 참의원은 원수와 육·해군 대신, 참모총장, 군령부 총장으로 구성되어 완전히 군부의 세력에 속했는데, 군부의 의견을 천황에게 전달하는 권리를 가졌다. 따라서 대권을 좌우하고 내각 통제와 정부의 대내외 정책에.. 2024. 1. 10.
[일본 근현대사]#35_메이지 헌법, 독일 헌법을 모방하다 메이지 헌법에 묻어난 일본 색채 메이지 헌법은 주로 유럽 각국, 특히 입헌 군주제의 색채가 강한 독일 헌법을 참고로 하여 제정되었다. 독일은 유럽에서 군국주의가 가장 강했고, 입헌 군주제와 강한 군사력 그리고 기독교가 주요한 국가적 특징이었다. 이러한 독일의 성격은 일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은 독일 헌법을 모방해 메이지 헌법을 수립한 후, 특히 1920~30년대에 이르러 자국 고유의 전통을 국민들에게 주입하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가 메이지 천황을 매우 대단한 인물이라 선전한 것도 한 예이다. 일본의 전통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일본은 자국의 필요에 의해 메이지 헌법을 해석하기 시작했다. 물론 어떤 나라든 자국 헌법을 여러 가지로 해석하기는 하지만, 1920~30년대에는 헌법 조항 .. 2024. 1. 10.
[일본 근현대사]#34_메이지 헌법에 관한 통찰 메이지 헌법과 민권 운동 메이지 헌법은 자유 민권 운동으로 인해 탄생했다. 헌법 제정을 요구하는 자유 민권 운동이 점점 거세지자, 메이지 정부는 헌법을 제정하고 국회를 수립하지 않으면 민중에 의해 정부가 전복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어떠한 헌법을 제정하고, 또 어떠한 국회를 수립할 것인가?' 이 문제를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정부 관료들이 유럽으로 시찰을 떠났다. 민중들은 국민 선거를 통해 의회를 수립해 의회가 민권을 대표해 권력을 장악할 것을 주장했지만, 정부는 의회의 권력을 최대한 제한해 버렸다. 의회가 아닌 강력한 정부를 중심으로 한 정치 체제를 수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독일 헌법이 자신들의 의도에 가장 부합하다 판단하여 독일 헌법을 모범으로 삼는다. 메이지 유신 시기에 일.. 2024. 1.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