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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29_근대 천황제 확립, 메이지 유신 이토 히로부미는 제헌 대권을 장악하고, 점진적인 제헌 계획을 착착 진행했다. 1882년에 독일을 방문해 1년 넘게 독일 헌법 제정을 연구한 바 있는 이토 히로부미는 독일식 헌법 제정을 모델로 했다. 독일 황제 빌헬름 1세가 이토 히로부미를 접견하고는 "일본 천황의 이익 차원에서 본다면 국회 소집은 축하할 일이 아니오. 부득이하게 국회를 설립했다고 해도, 헌법에 정부의 예산은 국회의 비준을 받아야 한다고 규정할 필요는 없소. 선생은 국회가 예산을 비준하지 않을 경우의 해결책을 준비해 놓는 것이 좋을 것이오."라고 답했다. 이 말을 듣고 이토 히로부미는 큰 깨달음을 얻었고, 이는 일본 헌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마지막 유신 3걸, 오쿠보 도시미치 살해되다 1878년 5월 14일 새벽 6시, 오쿠보 도시.. 2024. 1. 5.
[일본 근현대사]#28_메이지 유신, 도쿄 대학 설립 이노우에 고와시는 문부대신으로 재직한 1890년부터 1894년까지 일본의 산업 발전과 직업 교육을 위해 '실업 보습 학교 규정'과 '도제 학교 규정', '실업 교육 국고 보조법', '간이 학교 규정'을 제정했다. 이들 법안은 근대 산업 기술의 기본 지식과 기술을 지닌 기술 인재와 노동자를 양성하는 데 법률적인 기초를 제공했다. 1894년에 열린 제6회 의회에서 이노우에는 "포화가 없는 경쟁이기는 하지만, 지구상의 각국이 기술과 제조, 무역 분야에서 경쟁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루라도 태만하면 나라의 부강과 운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법률적인 지원 아래 메이지 중후반에는 직업 교육 체계가 형성되기도 했으며, 일본 제조업의 발전에 탄탄한 기반을 제공해 주었다. 1900년.. 2024. 1. 4.
[일본 근현대사]#27_<학교령 반포>메이지 유신, 교육제도를 수정하다. 1877년, 문부성 관리이자 저명한 학자인 니시무라 시게키는 제2 학구를 시찰한 후 교육 제도를 수정할 필요성을 느꼈다. 절대다수의 소학생이 1~2학년만 마치고 자퇴하고 있던 것이다. 농민들은 학비 부담과 일손 부족 등을 이유로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있었다. 또한 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들 대다수가 농민들의 생활과는 동떨어진, 무관한 개념들이 많았기에 농민들은 새 학교가 실용적인 것을 가르쳤던 과거의 데라코야보다도 못한 것으로 치부하곤 했다. 학제령 폐지 학제령은 시행 7년 만인 1879년에 폐지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교육령'이 반포되었다. 새 교육령은 다나카 후지마로와 미국인 고문 데이비드 머레이, 이토 히로부미가 미국식 자유 교육 사상에 근거해 제정하였다. 중앙 집권을 주장하는 프랑스의 교육 .. 2024. 1. 4.
[일본 근현대사]#26_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메이지 유신 1874년, 사족의 반란이 정부의 과감한 '군국 정치'에 의해 진압되고 나서 오쿠보 도시미치가 반란의 주동자인 에토 신페이를 심문했다. 그는 한때 함께 활동하던 동지의 변론을 듣고는 그날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에토의 추태가 그야말로 우스울 따름이었다." 나흘 후, 에토 신페이는 처형당했다. 그러나 그때 일본 전역의 대학교와 중학교, 소학교에서는 여전히 에토 신페이의 주도로 제정된 학제가 시행되고 있었다. 에토 신페이는 1871년 7월 새로 설립된 문부성(우리나라 교육부 같은 역할) 대보로 임명되어 교육 행정을 맡게 되었다. 그가 처음으로 착수한 사안이 바로 일본 전역에 있는 학교의 학제 통일이었다. 메이지유신 이전, 막부 시대의 교육 일본은 막부 시대부터 교육을 중시하는 전통이 있었다. 주요 .. 2024. 1. 3.
[일본 근현대사]#25_메이지 유신, 계몽의 서막 메이지 6년(1873년), 역사적으로 유명한 계몽 학술 단체인 '명육사'가 탄생했다. 그해 7일, 미국 주재 일본 공사 모리 아리노리가 귀국한 후 문학계 및 교육계 유명 인사들을 주축으로 학술 단체를 조직하고 문명개화 정책을 추진할 것을 건의했다. 메이지유신 계몽운동 니시무라 시게키의 노력으로, 츠다 마미치와 니시 아마네, 나카무라 마사나오, 가토 히로유키, 미쓰쿠리 린쇼, 미쓰쿠리 슈헤이, 스기 고지, 후쿠자와 유키치 등 일본 제일의 서양학자들이 학술 단체 조직에 대해 지지의 뜻을 밝혔다. 9월, 비로소 명육사가 설립되었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대표로 추대되었지만 그가 고사하여 스기 고지가 초대 대표가 되었다. 이듬해 3월, '명육잡지'가 발간되었다. 니시무라 시게키는 창간호의 창간 취지문에서 "일본의 .. 2024. 1. 3.
[일본 근현대사]#24_메이지 유신, 개화의 바람이 불다. 1873년 3월 20일 오후, 황궁에서 천황의 시중을 드는 여관들이 여느 때처럼 천황이 있는 어학문소에 도착했다. 그들은 여느 때처럼 천황의 머리를 빗겨주고, 당시의 궁중 풍습에 따라 천황의 얼굴에 분과 연지를 발라주어야 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간 여관들이 그 자리에서 멈칫 서더니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천황이 자기 머리카락을 잘라버린 것이 아닌가. 이는 일본 역사상 처음 벌어진 일이었다. 서양 문명을 좇아서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일본인들은 머리를 길게 길렀다. 그리고 무사들은 양쪽에 검을 차고 다닐 수 있는 권력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그들의 신분을 상징하는 것이자 생활 풍습이었다. 당시 일본에는 계급 제도가 매우 엄격해 화족과 평민의 통혼은 금지되었고, 옷차림만으로도 신분이 어떻게 되는지를 판.. 2024. 1. 2.
[일본 근현대사]#번외_'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 시부사와 에이이치 시부사와 에이이치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70세가 되도록 수많은 사업을 경영했다. 그는 자본주의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물이었으며, 자본주의의 기본인 이윤 추구를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윤을 추구하더라도 도덕과 윤리 규범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도 행동해야 하며, 오로지 이윤만을 추구하는 것 역시 옳은 행동이 아니라며 날 선 비판을 하였다. 당시까지도 일본에 널리 퍼져있던 유교적 사고관은 장사를 굉장히 불결한 것으로 간주했으며, 장사에 대한 이야기를 입에 담는 것을 수치스러운 일로 여겼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70세 이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자신의 널리 알리기 위해 '논어와 주판'이라는 저서를 저술하였고, 본인의 주장을 담은 오디오 레코드를 제작해 사회적으로 홍보하였다.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살던 시대.. 2024. 1. 2.
[일본 근현대사]#23_메이지 유신 1890년대, 산업의 비약적 발전 일본 초기 산업화 단계 시기에 일본의 식산흥업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기존의 관영 기업들을 대부분 민간 부문에 매각해 민간 자본주의 발전을 적극 지원하기 시작했다. 정부 관영기업 설립은 기업이 실리를 거두는 것을 보여주어 민간 부문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일시적인 조치였다. 따라서 정부는 선진 기술을 도입해 기술자를 양성한 후 이 기업들을 민간 부문에 매각했다. 메이지유신 1890년대, 산업의 발전 그러나 이들 기업은 관영으로 운영됐기 때문에 관리층의 임금이 너무 높고, 기업의 지출이 과도하다는 둥 여러 가지 문제점에 봉착해 있었다. 1880년대 초에는 철도, 광산을 제외한 대부분의 기업이 해마다 적자에 시달렸다. 1880년 일본 정부가 관영기업들을 매각한 것은 국가의 기업 설립 자금을 회수하는 것은.. 2024. 1. 1.
[일본 근현대사]#22_메이지 유신 초기, 면직물과 통신 분야 생사(삶아서 익히지 않은 명주실)는 일본의 주요 수출 품목으로, 오랫동안 총수출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효자 상품이었다. 당시 들여올 게 많았던 일본은 외국과의 무역에서 만성 적자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생사가 외화 수입을 벌어다 주는 몇 안 되는 품목이었다. 메이지 유신 초기, 면직물 산업 그러나 메이지 초기에 기술이 낙후되고 런던에서 막대한 양의 일본 생사가 조악한 품질로 인해 폐기되는 사건이 일어난 후, 일본 생사의 명성은 급격히 하락했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프랑스인들을 초빙해 관영 생사 공장을 건설하고 프랑스로부터 기계와 증기선을 도입했다. 이 공장이 건설되자 정부는 전국에 있는 사족의 아내와 딸들에게 모두 이 공장으로 와서 기술을 배우도록 하여 신기술을 전국적으로 보급하는 데 힘썼다... 2024. 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