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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25_예카테리나 교서_Part.2 예카테리나의 교서는 모두 22장 256조 655항으로 이루어진 풍부한 내용의 법령이다. 이 법령은 대부분 계몽사상가, 법학자, 경제학자들의 사상을 베껴놓은 것이다. 예카테리나도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서신을 통해 이를 인정했다. "당신도 아시겠지만 나의 나라에 이익이 된다면 나는 몽테스키외의 작품을 베끼고 그의 이름은 언급조차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그가 천국에서 나의 작품을 본다면 분명 나를 용서해 줄 거예요. 2,000만 국민의 행복을 위해 그럴 수밖에 없었던 내 행동을 말이에요. 몽테스키외는 너무나도 인류를 사랑해요. 그렇기 때문에 나를 원망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의 작품은 바로 나의 기도문입니다." 하지만 예카테리나의 교서는 단순히 외국의 사상을 베낀 것이 아니라 계몽학자들의 사상을 .. 2023. 12. 12.
[러시아사]#24_예카테리나 교서와 현실적 한계_Part.1 옛 러시아 사람들은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 신속하게 씨 뿌리는 일을 끝내야 했지만 막상 그 일이 끝나고 나면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러시아의 긴 겨울을 보냈다. 이러한 자연조건 때문에 러시아인들은 불굴의 인내와 가공할 만한 폭발력을 기르게 된 건 아닐까? 또한 따분하고 지루한 시간을 술로 보내며 시간을 낭비하는 버릇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러시아인들을 두고 "엄청난 핍박이 가해져야만 비로소 대단한 인내력을 발휘하는 민족"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러시아인들에게 동서를 나누는 광활한 영토는 호탕한 기개를, 혹독하게 추운 날씨는 비장함을 물려주었다. 이 때문에 쓸쓸함과 비애는 러시아 예술을 대표하는 정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비애는 나약한 영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으며 정신의 쇠퇴에 기인하.. 2023. 12. 6.
[러시아사]#23_예카테리나의 영토확장과 유럽식 러시아문화 독일 출신인 예카테리나 2세 주위에는 언제나 외국인들이 넘쳐났다. 게다가 그 주변의 러시아인 모두 유럽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러시아가 유럽에서 확고한 위치를 점해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주의자였던 그녀는 표트르 대제와 마찬가지로 러시아와 유럽 사이에 커다란 차이와 갈등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유명한 정치가이자 외교관이었던 한 대신은 예카테리나 2세가 세상을 떠난 후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유럽의 판도가 어떻게 변할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예카테리나 2세가 여제의 자리에 있고 내가 재상으로 있었을 때는 유럽의 대포가 러시아의 동의 없이는 단 한 방도 발사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러시아는 예카테리나 시절 때부터 유럽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2023. 12. 5.
[러시아사]#22_예카테리나와 계몽 사상 표트르의 개혁이 군사, 행정, 경제, 기술 분야에 치중했더라면, 예카테리나 2세는 정신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었다. 현대 러시아 문학과 예술, 사상의 기초를 닦은 것이다. 예카테리나 2세는 경제만 아니라 사상도 유럽과 가까워질 수 있도록 노력했다. 당시 유럽은 계몽사상이 유행하고 있었고 초기에는 예카테리나 2세도 계몽사상가인 볼테르를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꼽았다. 예카테리나는 볼테르와 같은 계몽사상가들과 늘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녀는 이들을 경제적으로 아낌없이 지원하였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에는 그녀는 새로운 법률 제정을 위한 법전편찬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이 위원회의 대표에는 농노를 제외한 각 계층의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가 제정한 정치와 법률에는 계몽사상이 녹아져 있었으나, 실제로 시행되지.. 2023. 12. 4.
[러시아사]#21_예카테리나 개혁과 그 한계점 예카테리나 2세는 당시 러시아 사람들에게 존경과 경외의 대상이었을 뿐 아니라 당대 미녀들과 겨루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출중한 미모를 자랑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녀를 아름다운 미모를 지닌 고대 오리엔트의 전설적인 여제 '세미라미스'라고 부르기도 했다. 예카테리나는 참정원, 총감, 성장들을 통해 러시아 제국 전체를 장악할 수 있었다. 그녀의 독재 정권은 나날이 강해져 갔고 관료제 역시 완벽하진 않았지만 그전보다 확실히 발전해 갔다. 이렇게 예카테리나는 홀몸으로 타국에 와서 자신의 입지를 확실히 다져나갔다. 하지만 여기서 만족했다면 예카테리나는 오늘날만큼의 명성과 존경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정신적으로도 러시아 전체를 장악하고 싶었던 그녀였기에 이제는 러시아의 귀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1763년, 그녀로.. 2023. 12. 4.
[러시아사]#20_예카테리나 2세의 경제, 정치개혁 예카테리나 2세는 쿠데타에 성공했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건 러시아의 파탄 난 경제와 고여버린 공무원들. 그녀가 칼을 뽑았다. 첫 과제는 경제 해결이고, 그다음은 바로 관료 정비였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예카테리나 2세는 냉혹한 현실에 부딪혔다. 당시 러시아의 상황은 참담하였는데, 외국에 주둔하던 주력 부대는 무려 8개월이나 월급을 받지 못해 불만이 쌓일 대로 쌓여있었으며, 해군 함대는 사실상 급료를 포기한 상태였다. 당시 국가 재정은 1,700만 루블 정도가 적자였는데, 더욱 심각한 것은 국고의 수입원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국내의 법 기강이 심각하게 무너지고 각종 부패 행위가 횡행해 돈만 있으면 법도 쉽게 주무를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극악무도한 대역죄이든 .. 2023. 12. 3.
[러시아사]#19_표트르 3세와 예카테리나 2세의 쿠데타 옐리자베타가 사망하고 러시아의 국왕 자리에 즉위한 표트르 3세는 자신의 주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예카테리나는 그런 표트르 3세를 보며 걱정하기보다는 기다리고 있었다. 표트르 3세를 대신해 그의 자리를 차지한 본인의 모습을 러시아에 뜻이 없던 표트르 3세는 그저 기분에 따라 마음대로 국정을 처리해 버리기 일쑤였다. 심지어는 프로이센과 전쟁에서 연일 승리하고 있던 러시아 군대에 갑자기 철수 명령을 내리고는 프로이센의 국왕이었던 프리드리히 2세와 평화 협정을 맺어버리기도 했다. 이러한 행보는 유럽 판도에 지대한 영향을 주기도 했다. 평화 협정을 맺은 이유는 단순했다. 그저 본인이 프리드리히 2세의 열렬한 추종자이기 때문이었다. 더 나아가서는 직접 부대를 이끌고 나가 프리드리히 2세의.. 2023. 12. 2.
[러시아사]#18_러시아, 예카테리나 2세의 등장 1762년, 또 한 명의 여제가 우스펜스키 사원에서 대관식을 올렸다. 이로써 표트르의 개혁은 마침내 충실한 계승자를 만나 계속 이어질 수 있었으며, 러시아 역시 다시금 발전 궤도에 오를 수 있었다. 그 여제가 바로 이번 편부터 다룰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재위 1762~1796)이다. 독일인이었던 그녀는 표트르에 이어 러시아 역사상 두 번째로 대제라는 칭호를 얻게 되는 인물이다. 남편의 시신을 밟고 황제 자리에 오른 그녀는 표트르 대제의 진정한 후계자로 등극했다. 가진 것 하나 없이 러시아로 온 그녀는 63만 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영토를 러시아의 손에 쥐어주기도 했다. 1744년, 14살의 한 프로이센 소녀가 고작 옷 몇 벌만 가진 채 러시아 궁정에 나타났다. 그 소녀의 이름은 소피아 아우구스타로, 프.. 2023. 12. 2.
[러시아사]#17_표트르 개혁의 명암(표트르 대제편 마무리) 표트르는 유럽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 한 것은 아니었다. 유럽에서 유학할 당시 그의 행동만 보더라도 국가 개혁에 대한 그의 태도를 알 수 있다. 표트르는 영국의 의회를 견학한 적이 있는데, 그 견학 방식은 보통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영국 의회의 출석 요청을 거절했던 표트르는 사실 의회가 어떻게 진행되는지가 궁금했었다. 결국 표트르가 선택한 방식은 창문 밖 지붕에서 회의장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의회의 가장 상석에 앉아 회의를 진행하면서 이따금 천장에 난 창문을 올려다보던 영국 국왕은 어느 날 지붕에서 회의장을 보고 있던 표트르 대제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는 에피소드까지 있다. 지금으로선 당시 표트르가 지붕 위에 앉아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서양 정치에 대한 이 같은 방관자적 태도.. 2023. 1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