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251 [러시아사]#21_예카테리나 개혁과 그 한계점 예카테리나 2세는 당시 러시아 사람들에게 존경과 경외의 대상이었을 뿐 아니라 당대 미녀들과 겨루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출중한 미모를 자랑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녀를 아름다운 미모를 지닌 고대 오리엔트의 전설적인 여제 '세미라미스'라고 부르기도 했다. 예카테리나는 참정원, 총감, 성장들을 통해 러시아 제국 전체를 장악할 수 있었다. 그녀의 독재 정권은 나날이 강해져 갔고 관료제 역시 완벽하진 않았지만 그전보다 확실히 발전해 갔다. 이렇게 예카테리나는 홀몸으로 타국에 와서 자신의 입지를 확실히 다져나갔다. 하지만 여기서 만족했다면 예카테리나는 오늘날만큼의 명성과 존경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정신적으로도 러시아 전체를 장악하고 싶었던 그녀였기에 이제는 러시아의 귀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1763년, 그녀로.. 2023. 12. 4. [러시아사]#20_예카테리나 2세의 경제, 정치개혁 예카테리나 2세는 쿠데타에 성공했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건 러시아의 파탄 난 경제와 고여버린 공무원들. 그녀가 칼을 뽑았다. 첫 과제는 경제 해결이고, 그다음은 바로 관료 정비였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예카테리나 2세는 냉혹한 현실에 부딪혔다. 당시 러시아의 상황은 참담하였는데, 외국에 주둔하던 주력 부대는 무려 8개월이나 월급을 받지 못해 불만이 쌓일 대로 쌓여있었으며, 해군 함대는 사실상 급료를 포기한 상태였다. 당시 국가 재정은 1,700만 루블 정도가 적자였는데, 더욱 심각한 것은 국고의 수입원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국내의 법 기강이 심각하게 무너지고 각종 부패 행위가 횡행해 돈만 있으면 법도 쉽게 주무를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극악무도한 대역죄이든 .. 2023. 12. 3. [러시아사]#19_표트르 3세와 예카테리나 2세의 쿠데타 옐리자베타가 사망하고 러시아의 국왕 자리에 즉위한 표트르 3세는 자신의 주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예카테리나는 그런 표트르 3세를 보며 걱정하기보다는 기다리고 있었다. 표트르 3세를 대신해 그의 자리를 차지한 본인의 모습을 러시아에 뜻이 없던 표트르 3세는 그저 기분에 따라 마음대로 국정을 처리해 버리기 일쑤였다. 심지어는 프로이센과 전쟁에서 연일 승리하고 있던 러시아 군대에 갑자기 철수 명령을 내리고는 프로이센의 국왕이었던 프리드리히 2세와 평화 협정을 맺어버리기도 했다. 이러한 행보는 유럽 판도에 지대한 영향을 주기도 했다. 평화 협정을 맺은 이유는 단순했다. 그저 본인이 프리드리히 2세의 열렬한 추종자이기 때문이었다. 더 나아가서는 직접 부대를 이끌고 나가 프리드리히 2세의.. 2023. 12. 2. [러시아사]#18_러시아, 예카테리나 2세의 등장 1762년, 또 한 명의 여제가 우스펜스키 사원에서 대관식을 올렸다. 이로써 표트르의 개혁은 마침내 충실한 계승자를 만나 계속 이어질 수 있었으며, 러시아 역시 다시금 발전 궤도에 오를 수 있었다. 그 여제가 바로 이번 편부터 다룰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재위 1762~1796)이다. 독일인이었던 그녀는 표트르에 이어 러시아 역사상 두 번째로 대제라는 칭호를 얻게 되는 인물이다. 남편의 시신을 밟고 황제 자리에 오른 그녀는 표트르 대제의 진정한 후계자로 등극했다. 가진 것 하나 없이 러시아로 온 그녀는 63만 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영토를 러시아의 손에 쥐어주기도 했다. 1744년, 14살의 한 프로이센 소녀가 고작 옷 몇 벌만 가진 채 러시아 궁정에 나타났다. 그 소녀의 이름은 소피아 아우구스타로, 프.. 2023. 12. 2. [러시아사]#17_표트르 개혁의 명암(표트르 대제편 마무리) 표트르는 유럽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 한 것은 아니었다. 유럽에서 유학할 당시 그의 행동만 보더라도 국가 개혁에 대한 그의 태도를 알 수 있다. 표트르는 영국의 의회를 견학한 적이 있는데, 그 견학 방식은 보통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영국 의회의 출석 요청을 거절했던 표트르는 사실 의회가 어떻게 진행되는지가 궁금했었다. 결국 표트르가 선택한 방식은 창문 밖 지붕에서 회의장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의회의 가장 상석에 앉아 회의를 진행하면서 이따금 천장에 난 창문을 올려다보던 영국 국왕은 어느 날 지붕에서 회의장을 보고 있던 표트르 대제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는 에피소드까지 있다. 지금으로선 당시 표트르가 지붕 위에 앉아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서양 정치에 대한 이 같은 방관자적 태도.. 2023. 12. 1. [러시아사]#16_'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과 의의 표트르에게 있어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거둔 승리가 더할 나위 없이 값진 이유는 바로 러시아가 발트해를 통해 유럽에 진출할 수 있는 바닷길이 생겼기 때문이다. 1703년 11월, 술과 소금을 가득 실은 네덜란드의 상선이 네바 강에 닻을 내렸다. 그 배의 선장은 금화 500개를 상금으로 받았다. 표트르는 네바강에서 가장 먼저 닻을 내리는 외국의 배에게 금화 500개를, 두 번째 배에는 300개를, 그리고 세 번째 배에는 금화 100개를 상금으로 주겠다 공표했었다. 표트르는 러시아와 유럽이 처음으로 직접 경제 교역을 하는 걸 특이한 방식으로 축하하며 만천하에 알리고 싶었음을 상징한다. 표트르는 유럽으로 향하는 러시아 최초의 관문인 이곳에 수백 척의 배들이 운집해 주기를 바라면서도, 이곳을 단순한 항구로만 남기고.. 2023. 12. 1. [러시아사]#15_발트해를 확보하라 : 대북방전쟁 '나르바전투'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여름 궁전에는 사자의 주둥이를 찢고 있는 삼손의 형상을 한 매우 특별한 동상이 하나 있다. 이 동상은 표트르가 강력한 해군의 힘을 이용해 스웨덴을 물리치고 네바 강변의 땅을 차지했던 위대한 승리를 표현한 것이다. 그곳을 정복한 일은 러시아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이 땅을 손에 넣기 위해 러시아는 수년 동안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그러면서 수많은 패배를 맛보기도 하였는데, 이런 패배는 단념이 아닌 오히려 표트르의 의지를 더 단단히 해주었다. 그러면서 전쟁에 대한 경험치 쌓이면서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는지를 배워나갔다. 그는 완전한 승리에 다다를 때까지 몇 번이나 싸움과 패배를 거듭했다. 1700년, 표트르는 북유럽 패권자였던 스웨덴과 나르바 강에서 첫 번째 .. 2023. 11. 30. [러시아사]#14_세계와바다를 향한 관문: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사학] - [러시아사]#13_표트르 대제의 러시아 개혁: 두 번째 이야기 [러시아사]#13_표트르 대제의 러시아 개혁: 두 번째 이야기 [역사학] - [러시아사]#12_표트르 대제의 러시아 개혁: 첫 번째 이야기 [러시아사]#12_표트르 대제의 러시아 개혁: 첫 번째 이야기 [역사학] - [러시아사]#11_16~18세기 유럽과 러시아의 격차 [러시아사] readmyworld.tistory.com 2003년 5월 27일, 러시아 연방 대통령의 초대를 받은 전 세계 45개 국가의 원수 및 정부 대표가 한자리에 모여 상트페테르부르크 탄생 300주년을 축하했다. 러시아 정부는 자그마치 30억 달러를 들여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복원했으며, 이 축제는 5년 전부터 준비되었다. 세계적으로 3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2023. 11. 27. [러시아사]#13_표트르 대제의 러시아 개혁: 두 번째 이야기 [역사학] - [러시아사]#12_표트르 대제의 러시아 개혁: 첫 번째 이야기 [러시아사]#12_표트르 대제의 러시아 개혁: 첫 번째 이야기 [역사학] - [러시아사]#11_16~18세기 유럽과 러시아의 격차 [러시아사]#11_16~18세기 유럽과 러시아의 격차 앞선 글들에서 언급했듯이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라는 낙후된 국가에서 유럽으로 유학을 떠 readmyworld.tistory.com 1722년, 표트르는 14등급으로 이루어진 관등표를 제정했다. 혈통이나 출생 신분이 아닌 능력에 따른 승급 제도를 마련했다. 철저한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은 가난한 집안 출신의 인재들에게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계기가 됐다. 이 덕분에 모스크바 길거리에서 빵을 팔던 멘시코프는 육군 장교로 승진할 수 있었으며, 공작으로 봉.. 2023. 11. 27. 이전 1 ··· 23 24 25 26 27 2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