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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12_구미 사절단의 서구 열강 방문 이와쿠라 사절단은 태평양을 가로질러 1872년 1월 15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지만, 폭설과 바람으로 발이 묶여서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보름 동안 체류할 수밖에 없었다. 부사인 이토 히로부미는 이 기간에 조약 개정 요구안을 작성했다. 일본은 안세이 조약의 효력이 1872년 7월로 만료되면 구미 각국의 정치 제도와 풍습, 교육 등을 일본에 도입해 국력을 강화함으로써 일본을 열강과 같은 선진국 대열에 올려놓기를 희망했다. 미국 방문 1월 21일, 사절단이 워싱턴에 도착해 그랜드 미국 대통령이 주최하는 성대한 연회에 참석했다. 사절단은 미국의 선진화된 항해 기술과 철도 기술, 그들과 다른 신기한 풍습에 감탄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조약 개정 단계에서 사절단은 미국의 또 다른 면을 발견했다. 이와쿠라 도모미는 해밀.. 2023. 12. 26.
[일본 근현대사]#11_폐번치현, 일본 메이지유신의 시작 '판적봉환' : 다이묘들이 판(토지)과 적(농민)을 천왕에게 반납한 일. 사쓰마, 조슈, 도사, 히젠 등의 신정부 주도 세력이 앞장서서 봉환함으로써 다른 다이묘들도 이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판적봉환이 성공적으로 진행됨으로써, 전국 토지와 농민은 천황, 다시 말해 중앙 정부의 소유가 되었다. 1869년 2월, 위의 네 번은 웅번들이 도막 파의 압력에 의해 천황에게 판적봉환을 실시해야 한다는 상주를 올렸다. 그해 7월, 이미 236개 번의 판적(땅과 농민)이 봉환되어 각 번의 번주들이 백성과 토지에 대한 봉건 영유권을 상실하기는 했지만, 번의 칭호는 유지했으며, 옛 번주가 번지사로 임명되어 각 번의 최고 행정 장관이 되어 중앙 정부의 명령에 따라 번을 통치했다. 다이묘와 구게의 칭호는 폐지되었으며, 모두 .. 2023. 12. 25.
[일본 근현대사]#10_구미 사절단 파견과 메이지 신정권 등장 이와쿠라 사절단의 구미 시찰 중 프로이센에서 러시아로 향하는 기차에서 기도 다카요시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는 국가마다 크기도 문화도 다르지만, 국가의 흥망성쇠는 오로지 해당 국가의 법과 제도에 달려 있음을 깨달았다. 구미사절단 파견 1871년 12월 23일 일본 요코하마항, 4,500톤짜리 미국 상선 아메리카호가 천천히 항구를 벗어나고 있었다. 항구에는 일본의 구미 사절단을 배웅하러 나온 사람들이 있었으며, 아메리카호에는 그들과 작별을 고하고 있는 구미 사절단 단원들이 인사하고 있었다. 이 배는 요코하마에서 출항하여 미국 서부 샌프란시스코를 향했다. 이는 일본 그 후 일본의 역사를 송두리째 바꿀 항해였다. 이와쿠라 사절단이라고도 불리는 이 사절단은 유럽과 미국을 2년에 걸쳐 둘러본다. 2년이란 시간.. 2023. 12. 25.
[일본 근현대사]#9_보신전쟁, 저물어가는 막부 시대, 그리고 메이지 유신의 시작 왕정복고 정변으로 인해 조정을 차지한 도막파와 막부의 갈등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제 그들에게 전쟁은 피할 수 없는 대화 수단이 되었다. 이튿날 교토 서부의 니조 성에 머물고 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관직을 취소한다는 어지를 받았다. 보신전쟁(1868~1969) 전날 새벽부터 그의 친번 위병들도 조정에서 모두 철수당했으며,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그는 정변을 일으켜야 할 때가 왔음을 직감하고 정변 준비에 착수한다. 당시 그의 수중에는 1만 군대가 있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민심은 술렁이고 장정들은 갑옷으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후다이 다이묘들이 성 밖을 지키고, 성안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어지를 전하러 온 오와리 번주 도쿠가와 요시카츠와 에치젠 번주 마쓰다이라 요시나에게 어지.. 2023. 12. 24.
[일본 근현대사]#8_도막파의 왕정복고(vs 쇼군의 대정봉환) 1866년 4월, 교토의 사쓰마번 관저에서는 조슈번의 기도 다카요시와 사쓰마번의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가 담판을 시작했다. 도사 번의 사카모토 료마와 나카오카 신타로의 물밑 작업에 힘입어 강력한 두 개의 번이 서로 손을 잡은 것이다. 이 담판에서 사쓰마번은 조슈번에 위기가 닥칠 경우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기로 약속했다. 그러자 막부는 조슈번을 겨냥한 제2차 조슈 정벌을 일으켰다. 막부와 조슈번, 두 세력의 뒤에는 각각 프랑스와 영국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제2차 조슈 정벌 7월 18일, 막부가 제2차 조슈 정벌을 시작했으나, 사쓰마번은 약속을 깨고 출병을 거부했다. 다른 30개 번이 네 방향에서 조슈에 협공을 펼쳐, 조슈는 본거지인 오시마를 내주어야 했다. 하지만 조슈번은 다카스기 신사쿠가 직접 .. 2023. 12. 24.
[일본 근현대사]#7_존왕양이 사상과 막부의 몰락 1860년대 당시 일본 전역에서 외국인에 대한 분노가 들끓고, 외국인에게 저항하는 사건이 빈번히 일어났다. 1862년 9월 14일, 사쓰마번 번주의 후견인인 시마즈 히사미쓰는 양이에 관한 조정의 의지를 막부에 전달한 후 에도를 떠나 귀로에 올랐다. 외국과 갈등한 일련의 사건들 그런데 그의 일행 700여 명이 요코하마 부근 나마무기촌에 다다랐을 무렵, 4명의 외국인이 말을 타고 나타났다. 그들은 요코하마에서 수출업을 하는 영국인 리처드와 그 회사 직원 클라크, 그리고 홍콩에서 활동하던 영국인 상인 부부였다. 히사미쓰 일행이 길을 모두 점거하고 행진하자, 이 네 명의 영국인은 가던 길을 멈추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영국인 부인이 타고 있던 말이 무언가에 놀랐는지 갑자기 히사미쓰 일행을 향해 돌진하였다. .. 2023. 12. 22.
[일본 근현대사]#6_막부의 대외 개방, 아시아를 넘어 유럽으로 이이 나오스케가 암살당한 후, 막부는 통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전통적인 천황의 위엄과 숭배 정신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막부는 천황과의 대립적인 분위기를 완화하고, 조정과 막부가 공동으로 통치하는 공무 합체를 실시했다. 그런데 정치 무대에 등장해 막부와의 연합을 통해 내우외환을 극복하고, 봉건 통치 체제를 유지하고자 했던 웅번 다이묘들 가운데 가장 실력이 막강한 세력으로 조슈번(지금의 야마구치현 지역)과 사쓰마번(지금의 가고시마현 지역)이 되었다. 이 두 번의 연합을 '삿초 동맹'이라 한다. 해안이 인접해 있는 조슈번과 사쓰마번은 막부 말기에 막부가 무력해지는 것을 보고, 각자의 번에서 먼저 개혁을 실시해 군사력과 경제력을 증강했다. 조슈번은 농촌의 관리 계층을 지원해 농업 생산을 장려하는 것과 동시에,.. 2023. 12. 21.
[일본 근현대사]#5_사쿠라다몬 사건 안세이 5개국 조약 체결 후 200년이 넘게 교토에 연금되어 있던 천황과 구게가 갑자기 일본이란 국가의 주인공이 됐다. 그들은 수많은 다이묘와 지사들의 옹호를 받으며, 조약 체결에 발언권을 얻게 되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사쿠라다몬 사건 1860년 3월 24일 오전 8시, 에도 성에 진눈깨비가 흩날리고 있을 때였다. 막부의 다이로(특수 시기에 설치된 막부 최고 관직, 로주보다 서열이 높다) 이이 나오스케가 60명의 호위병에게 둘러싸여 에도의 사쿠라다몬을 향하고 있었다. 그의 일행이 사쿠라다몬에 도착하자, 갑자기 북소리가 울리더니 길 양쪽에 18명의 자객이 나타나 이이 나오스케가 탄 가마를 덮쳤다. 호위병들은 갑작스레 닥친 상황에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렸다. 자객들은 호위병들이 정신을 못 차리는 틈을.. 2023. 12. 21.
[일본 근현대사]#4_근대화의 태동, 요시다 쇼인과 가나가와 조약 18세기말부터 서양의 군함이 빈번하게 일본 근해에 출몰하는데, 일본의 문을 두드린 횟수는 무려 52차례에 달했다. 가장 먼저 일본을 충격에 빠뜨린 열강은 러시아였다. 개항 전 여러 에피소드 1777년, 야쿠츠크 상인 레베데프가 이끄는 원정대가 홋카이도 앗케시를 압박하며, 마츠마에번과의 통상을 요구했다. 1792년 러시아 사절 락슈만이 통상을 요구하기 위해 홋카이도 네무로를 찾아왔다. 러시아의 정식 사절이 방문하자, 막부도 어쩔 수 없이 해안 방어책을 세웠다. 나아가 서양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 네덜란드의 서적을 대량 수집하기도 했다. 그 후 일본의 서구파 인사들은 린가쿠(네덜란드어를 통해 서구의 과학, 기술을 연구하고, 서구에 대한 지식을 얻고자 했던 학풍) 연구에 몰두했다. 19세기에는 영국과 미국이 일.. 2023. 12.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