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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16_메이지유신의 군사력 확충, 징병제 도입 1872년,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정부에 '군비 의견서'를 제출하고, 유럽의 군제를 본떠 징병제를 실시할 것을 건의했다. 1872년 말부터 1873년 초까지 사절단이 유럽을 시찰하고 있던 시기에 천황은 '징병조서'를 선포하고, 태정대신이 '징병고유'와 '징병령'을 발표했다. 또 1872년에는 육군과 해군을 두는 국제적인 추세에 발맞추기 위해 구시대적인 분위기가 짙은 병부를 폐지하고 군대를 관리하는 육군성과 해군성을 설립하고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육군성 대보로, 막부에서 군대 총감을 역임한 가쓰 가이슈를 해군성 대보로 임명했다. 징병제는 육군을 복무 기간 3년의 상비군과 2년의 후비군, 국민군으로 분류해 입대자가 3년간 현역으로 복무한 뒤 제1 후비군과 제2 후비군으로 각각 2년씩 총 7년간 복무하도록 했으며.. 2023. 12. 28.
[일본 근현대사]#15_메이지유신 군제 개혁, 군국주의의 길을 걷다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유럽과 미국의 군제를 견학하던 시기에 때마침 프로이센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쟁 결과, 약소국이었던 프로이센이 승리하며 프랑스에 영토 할양과 배상금을 요구했다. 비스마르크와 독일 황제는 그들의 영토에서가 아닌,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 건국 기념식을 거행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프로이센 군국주의의 강한 군사력과 군대 조직 방식에 큰 감명을 받았다. "정했다. 일본이 따라야 할 군사 체제는 프로이센이다!" 그는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건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앙 정부가 통솔하는 제국 군대를 창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 군제 개혁에 바람이 불다 1870년 8월 3일, 유럽과 미국의 군제를 시찰하고 귀국한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사이고 쓰구미치가 메이지 .. 2023. 12. 27.
[일본 근현대사]#14_메이지유신 정한론 vs 내치파, 그 승자는? 서구 시찰의 주역인 사이고 다카모리는 정부의 참의로서 1년 반 동안 폐변치현과 군제 개혁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그는 도쿄의 들뜬 분위기에 불만을 가졌고, 정부가 상업관리소로 전락했다며 비난을 아끼지 않았다. 바로 이때, 육군대보인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대장대보인 이노우에 가오루가 상인들과 결탁하여 공금을 횡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정부가 분열될 위기에 처했다. 더욱이 사쓰마 출신의 군관이 1872년부터 정부에 타이완 공격을 주장하자,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생인 사이고 쓰구미치가 적극적으로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정한론 한편 조선과의 관계 역시 악화 일로를 걸었다. 메이지 유신 전까지 막부는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지 못하게 했으며 양국 간의 사안은 가운데에 있는 대마도 번주가 처리하도록 하였다... 2023. 12. 27.
[일본 근현대사]#13_프로이센, 메이지유신의 롤모델이 되다. 서구 각국의 교육 보급 실태도 사절단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기도 다카요시는 일본인이 서양인과 크게 다를 바가 없지만 배움의 차이만큼은 절대적으로 다르다고 말했다. 교육 제도 미국의 교육 보급률은 일본을 비교 불가하게 앞서 있었다. 일본은 근대화하기 위해서는 인재 육성은 불가피한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학교 설립이 우선 과제라고 강조했다. 사절단은 동서양 전통 사상의 차이로 인해 교육의 내용도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결론지었다. 서양에서는 근대 과학 지식과 실용적인 학문을 중시하고 유형의 학문을 강조하는 반면, 동양에서는 오래전부터 중국에서 발원한 유학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현실적이지 못한 무형의 학문을 강조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런 교육의 차이가 동서양의 빈부 격차를 초래한 원인이라고 보았다. 다시 말해 .. 2023. 12. 26.
[일본 근현대사]#12_구미 사절단의 서구 열강 방문 이와쿠라 사절단은 태평양을 가로질러 1872년 1월 15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지만, 폭설과 바람으로 발이 묶여서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보름 동안 체류할 수밖에 없었다. 부사인 이토 히로부미는 이 기간에 조약 개정 요구안을 작성했다. 일본은 안세이 조약의 효력이 1872년 7월로 만료되면 구미 각국의 정치 제도와 풍습, 교육 등을 일본에 도입해 국력을 강화함으로써 일본을 열강과 같은 선진국 대열에 올려놓기를 희망했다. 미국 방문 1월 21일, 사절단이 워싱턴에 도착해 그랜드 미국 대통령이 주최하는 성대한 연회에 참석했다. 사절단은 미국의 선진화된 항해 기술과 철도 기술, 그들과 다른 신기한 풍습에 감탄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조약 개정 단계에서 사절단은 미국의 또 다른 면을 발견했다. 이와쿠라 도모미는 해밀.. 2023. 12. 26.
[일본 근현대사]#11_폐번치현, 일본 메이지유신의 시작 '판적봉환' : 다이묘들이 판(토지)과 적(농민)을 천왕에게 반납한 일. 사쓰마, 조슈, 도사, 히젠 등의 신정부 주도 세력이 앞장서서 봉환함으로써 다른 다이묘들도 이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판적봉환이 성공적으로 진행됨으로써, 전국 토지와 농민은 천황, 다시 말해 중앙 정부의 소유가 되었다. 1869년 2월, 위의 네 번은 웅번들이 도막 파의 압력에 의해 천황에게 판적봉환을 실시해야 한다는 상주를 올렸다. 그해 7월, 이미 236개 번의 판적(땅과 농민)이 봉환되어 각 번의 번주들이 백성과 토지에 대한 봉건 영유권을 상실하기는 했지만, 번의 칭호는 유지했으며, 옛 번주가 번지사로 임명되어 각 번의 최고 행정 장관이 되어 중앙 정부의 명령에 따라 번을 통치했다. 다이묘와 구게의 칭호는 폐지되었으며, 모두 .. 2023. 12. 25.
[일본 근현대사]#10_구미 사절단 파견과 메이지 신정권 등장 이와쿠라 사절단의 구미 시찰 중 프로이센에서 러시아로 향하는 기차에서 기도 다카요시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는 국가마다 크기도 문화도 다르지만, 국가의 흥망성쇠는 오로지 해당 국가의 법과 제도에 달려 있음을 깨달았다. 구미사절단 파견 1871년 12월 23일 일본 요코하마항, 4,500톤짜리 미국 상선 아메리카호가 천천히 항구를 벗어나고 있었다. 항구에는 일본의 구미 사절단을 배웅하러 나온 사람들이 있었으며, 아메리카호에는 그들과 작별을 고하고 있는 구미 사절단 단원들이 인사하고 있었다. 이 배는 요코하마에서 출항하여 미국 서부 샌프란시스코를 향했다. 이는 일본 그 후 일본의 역사를 송두리째 바꿀 항해였다. 이와쿠라 사절단이라고도 불리는 이 사절단은 유럽과 미국을 2년에 걸쳐 둘러본다. 2년이란 시간.. 2023. 12. 25.
[일본 근현대사]#9_보신전쟁, 저물어가는 막부 시대, 그리고 메이지 유신의 시작 왕정복고 정변으로 인해 조정을 차지한 도막파와 막부의 갈등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제 그들에게 전쟁은 피할 수 없는 대화 수단이 되었다. 이튿날 교토 서부의 니조 성에 머물고 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관직을 취소한다는 어지를 받았다. 보신전쟁(1868~1969) 전날 새벽부터 그의 친번 위병들도 조정에서 모두 철수당했으며,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그는 정변을 일으켜야 할 때가 왔음을 직감하고 정변 준비에 착수한다. 당시 그의 수중에는 1만 군대가 있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민심은 술렁이고 장정들은 갑옷으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후다이 다이묘들이 성 밖을 지키고, 성안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어지를 전하러 온 오와리 번주 도쿠가와 요시카츠와 에치젠 번주 마쓰다이라 요시나에게 어지.. 2023. 12. 24.
[일본 근현대사]#8_도막파의 왕정복고(vs 쇼군의 대정봉환) 1866년 4월, 교토의 사쓰마번 관저에서는 조슈번의 기도 다카요시와 사쓰마번의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가 담판을 시작했다. 도사 번의 사카모토 료마와 나카오카 신타로의 물밑 작업에 힘입어 강력한 두 개의 번이 서로 손을 잡은 것이다. 이 담판에서 사쓰마번은 조슈번에 위기가 닥칠 경우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기로 약속했다. 그러자 막부는 조슈번을 겨냥한 제2차 조슈 정벌을 일으켰다. 막부와 조슈번, 두 세력의 뒤에는 각각 프랑스와 영국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제2차 조슈 정벌 7월 18일, 막부가 제2차 조슈 정벌을 시작했으나, 사쓰마번은 약속을 깨고 출병을 거부했다. 다른 30개 번이 네 방향에서 조슈에 협공을 펼쳐, 조슈는 본거지인 오시마를 내주어야 했다. 하지만 조슈번은 다카스기 신사쿠가 직접 .. 2023. 12.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