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251 [일본 근현대사]#21_메이지 유신, 식산흥업 정책을 실시하다 1872년, 도쿄에서 요코하마에 이르는 일본 최초의 철도가 개통했다. 많은 일본인이 개통기념식을 구경하기 위해 도쿄 신바시에 몰려왔다. 1874년에는 오사카-고베 철도가 건설되었고, 1877년에는 교토-오사카 철도가 개통되었다. 도쿄-요코하마 철도는 정부가 런던에서 100만 파운드의 공채를 발행해 건설한 것이었다. 일본 철도 산업의 발전 메이지 초기에 철도 건설을 지휘했던 이노우에 마사루는 훗날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메이지 초기에는 서양식 건축을 공부한 사람이 없었다. 철도 건설을 시작했을 때, 측량과 설계, 시공 및 기차 운전은 모두 외국인이 담당했다. 기수라고 불리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일본인이 외국 기술자를 따라다니며 일본인 노동자들과의 통역을 도맡아 했다. 당시 일본인 노동자들은.. 2023. 12. 30. [일본 근현대사]#20_메이지 유신, 토지세를 개편하다 일본의 산업화는 부족했던 인프라 확충을 바탕으로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다. 이와쿠라 사절단이 일본으로 돌아온 후, 식산흥업은 정부의 당면 과제가 되었다. 오쿠보 도시미치 정권은 서구 열강들처럼 산업화에 온 힘을 쏟아붓기로 결정하고 과감한 개혁 정책을 단행했다. 1874년, 오쿠보 도시미치는 '식산흥업에 관한 건의서'에서 "국력은 국민의 빈부에 따라 좌우되고, 국민의 빈부는 물자의 많고 적음에 따라 결정된다. 물자의 많고 적음은 국민들이 산업에 주력하는지의 여부에 따라 결정되지만, 그 바탕에는 정부의 유도와 장려가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깔려 있다."라고 주장했다. 토지세 개혁 메이지 초기 봉건 번주들에게 판적봉환을 명령한 직후, 세스현의 일개 현령인 무쓰 무네미쓰가 종전의 토지 측량법을 바꾸어 전국적으로 .. 2023. 12. 30. [일본 근현대사]#19_메이지 유신과 세이난 전쟁(2) 유신 원로들의 폭동을 제압하고, 처형하여, 규슈 지역은 오쿠보 도시미치 정부에 대한 민심이 박살날대로 박살 났다. 언제 반란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가고시마에 특권을 주는 회유책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사족들의 반란을 줄이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오쿠보 도시미치는 그래도 믿는 구석이 있었는데, 바로 같은 *유신 삼걸이었던 사이고 다카모리였다. 그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통치력을 믿고 있었다. 그가 결코 경솔하게 반란을 주도할 사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유신 삼걸 :기도 다카요시,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그러나 가와지 도시요시는 치안 책임자로서, 가고시마로 사람을 보내 동향을 살피는 것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다. 당시 정부의 무기고는 사이고 다카모리가 .. 2023. 12. 29. [일본 근현대사]#18_메이지 유신과 세이난 전쟁(1) 세이난 전쟁이 일어났을 때 가와지 도시요시는 도쿄 경시청의 수뇌로서 가고시마의 동향을 예의 주시했다. 과거 유신의 영웅이었던 사이고 다카모리가 그의 고향인 가고시마에서 폭동을 일으키려 했기 때문이다. 세이난 전쟁 메이지 6년, 10월 정변이 일어난 후, 사이고 다카모리, 에토 신페이,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공직을 사퇴하고 메이지 정부를 떠났다. 메이지 유신 과정에 큰 공을 세운 그들이었지만 정부를 정한론을 둘러싸고 오쿠보 도시미치를 비롯한 내치파와 대립하다가, 정부를 떠난 후에는 불평사족의 중심 역할을 맡았다. 오쿠보 도시미치의 개혁 방향은 사족의 이익을 직접적으로 침해하는 부분이 있었기에 이 갈등은 훗날 세이난 전쟁으로 발발했다. 유신 원로들의 반란 1874년부터 몇몇 메이지 유신 원로들이 폭동을 일으키.. 2023. 12. 29. [일본 근현대사]#17_경찰 제도 개혁과 무사 계급의 몰락 메이지 6년(1873년)은 큼직큼직한 사건들이 계속해서 발생한 해였다. 그해 일본 역사에는 수많은 사람의 이름이 등장하고, 또 많은 유학생이 유럽과 미국에서 귀국해 일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경찰 제도 수립, 국내를 다스릴 수단 기도 다카요시와 오쿠보 도시미치가 구미 시찰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이자 10월 정변이 일어나기 직전인 9월, 가와지 도시요시도 구미 시찰을 마치고 귀국했었다. 그는 경찰 제도 관련하여 담당하고 있었다. 폐번치현을 실시하기 전 일본의 경찰과 군대는 구분이 모호했다. 군대도 일상적인 치안 관리에 참여해 도쿄의 경찰을 '부병'이라고 부르고, 전국 각지에 현병과 구병이 있었다. 1871년 이후, 전국적으로 경찰의 명칭이 나졸로 바뀌었다. 1872년에는 사법성 내에 경보료를 설치해.. 2023. 12. 28. [일본 근현대사]#16_메이지유신의 군사력 확충, 징병제 도입 1872년,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정부에 '군비 의견서'를 제출하고, 유럽의 군제를 본떠 징병제를 실시할 것을 건의했다. 1872년 말부터 1873년 초까지 사절단이 유럽을 시찰하고 있던 시기에 천황은 '징병조서'를 선포하고, 태정대신이 '징병고유'와 '징병령'을 발표했다. 또 1872년에는 육군과 해군을 두는 국제적인 추세에 발맞추기 위해 구시대적인 분위기가 짙은 병부를 폐지하고 군대를 관리하는 육군성과 해군성을 설립하고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육군성 대보로, 막부에서 군대 총감을 역임한 가쓰 가이슈를 해군성 대보로 임명했다. 징병제는 육군을 복무 기간 3년의 상비군과 2년의 후비군, 국민군으로 분류해 입대자가 3년간 현역으로 복무한 뒤 제1 후비군과 제2 후비군으로 각각 2년씩 총 7년간 복무하도록 했으며.. 2023. 12. 28. [일본 근현대사]#15_메이지유신 군제 개혁, 군국주의의 길을 걷다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유럽과 미국의 군제를 견학하던 시기에 때마침 프로이센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쟁 결과, 약소국이었던 프로이센이 승리하며 프랑스에 영토 할양과 배상금을 요구했다. 비스마르크와 독일 황제는 그들의 영토에서가 아닌,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 건국 기념식을 거행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프로이센 군국주의의 강한 군사력과 군대 조직 방식에 큰 감명을 받았다. "정했다. 일본이 따라야 할 군사 체제는 프로이센이다!" 그는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건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앙 정부가 통솔하는 제국 군대를 창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 군제 개혁에 바람이 불다 1870년 8월 3일, 유럽과 미국의 군제를 시찰하고 귀국한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사이고 쓰구미치가 메이지 .. 2023. 12. 27. [일본 근현대사]#14_메이지유신 정한론 vs 내치파, 그 승자는? 서구 시찰의 주역인 사이고 다카모리는 정부의 참의로서 1년 반 동안 폐변치현과 군제 개혁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그는 도쿄의 들뜬 분위기에 불만을 가졌고, 정부가 상업관리소로 전락했다며 비난을 아끼지 않았다. 바로 이때, 육군대보인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대장대보인 이노우에 가오루가 상인들과 결탁하여 공금을 횡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정부가 분열될 위기에 처했다. 더욱이 사쓰마 출신의 군관이 1872년부터 정부에 타이완 공격을 주장하자,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생인 사이고 쓰구미치가 적극적으로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정한론 한편 조선과의 관계 역시 악화 일로를 걸었다. 메이지 유신 전까지 막부는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지 못하게 했으며 양국 간의 사안은 가운데에 있는 대마도 번주가 처리하도록 하였다... 2023. 12. 27. [일본 근현대사]#13_프로이센, 메이지유신의 롤모델이 되다. 서구 각국의 교육 보급 실태도 사절단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기도 다카요시는 일본인이 서양인과 크게 다를 바가 없지만 배움의 차이만큼은 절대적으로 다르다고 말했다. 교육 제도 미국의 교육 보급률은 일본을 비교 불가하게 앞서 있었다. 일본은 근대화하기 위해서는 인재 육성은 불가피한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학교 설립이 우선 과제라고 강조했다. 사절단은 동서양 전통 사상의 차이로 인해 교육의 내용도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결론지었다. 서양에서는 근대 과학 지식과 실용적인 학문을 중시하고 유형의 학문을 강조하는 반면, 동양에서는 오래전부터 중국에서 발원한 유학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현실적이지 못한 무형의 학문을 강조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런 교육의 차이가 동서양의 빈부 격차를 초래한 원인이라고 보았다. 다시 말해 .. 2023. 12. 26. 이전 1 ··· 20 21 22 23 24 25 26 ··· 2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