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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54_5개년 계획 경제, 소련을 강대국으로 만들어주다 소련, 계획 경제로 인한 성장 1935년 8월 30일 밤, 돈바스의 젊은 광부 스타하노프는 석탄 채굴 방법을 개선해 6시간 만에 평소 채굴량의 13배인 102톤의 석탄을 캐냈다. 그의 이야기는 금세 사람들 사이에서 뉴스로 떠올랐다. 그리고 1주일 후 스타하노프는 자신의 기록을 깨고 하루 만에 175톤의 석탄을 채굴했다. 스타하노프는 더 이상 평범한 광부가 아니었다. 그의 이름은 소련의 공업화 과정에서 생산 기술 혁신 운동의 대명사로 떠올랐다. 그 후 각 분야에서는 수없이 많은 스타하노프가 탄생했다. 그들의 주도하에 1933~37년까지 실시된 소련의 2차 5개년 계획은 당초 예상했던 63퍼센트를 훨씬 웃도는 82퍼센트에 이르는 효율을 올렸다. 수많은 스타하노프는 사회주의의 빠른 발전을 이끌었는데, 교육 분.. 2024. 3. 7.
[러시아사]#53_소련의 계획 경제, 1차 5개년 계획과 1929년 세계 대공황 소련, 국가 단위의 '경제 계획'을 시행하다. 소련의 1차 5개년 계획은 인류 최초의 경제 계획이었다. 5개년 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정부가 '국가가 중공업 발전을 가속화하고 농업 부문의 투자를 줄이며 공업 투자를 늘린다.'와 같은 기본적인 사항을 결정하면 농업, 공업, 군사, 문화를 비롯한 소련의 모든 조직이 법에 따라 결정된 사항과 관련된 자원 및 경영에 관한 구체적인 자료를 제출했다. 그러면 국가계획위원회는 소련에서 가장 뛰어난 통계학자, 경제학자, 기술 전문가들을 동원해 대량의 자료를 분석하고 구체적인 5개년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수정과 심사를 거쳐 최종 계획을 수립했다. 1차 5개년 계획의 내용은 모두 3권으로 무려 1,600페이지에 이르렀다. 그 내용은 중공업, 경공업, 농업.. 2024. 3. 7.
[러시아사]#52_스탈린의 등장, 소련 고속 공업화의 길을 걷다 소련 공업화 노선을 취하다 레닌의 빈자리를 스탈린이 채웠다. 스탈린이 물려받은 소련은 여전히 자본주의 국가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었다. 1920년대는 자본주의 황금시대였다. 서양의 각국은 제1차 세계대전 후유증에서 벗어났고, 주요 국가의 공업 생산량은 전쟁 전의 150퍼센트를 웃돌았다. 일부 서양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로 인해 빈곤이 사라졌으며 서양 세계는 이미 영원한 번영의 단계에 들어섰다고 평가했다. 당시만 해도 곧 다가올 경제 위기를 예측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눈앞의 번영으로 자신감이 가득했던 서양 세계는 여전히 소련 경제에 대한 봉쇄 정책을 풀지 않았다. 1927년, 영국은 소련과의 단교를 선언하고 1921년 서명한 영소 무역협정을 무효로 했다. 한편 영국의 외무장관 체임벌린은 6개국 외무장관 회.. 2024. 3. 6.
[러시아사]#51_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의 탄생과 레닌의 죽음 러시아를 공업 국가로 바꾼 레닌 많은 국가에서 문화와 교육을 흡수했던 레닌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던 러시아를 심폐 소생하기 시작했다. 1918년부터 4년 동안 네 가지 정책, 즉 전시공산주의, 식량 징발제, 식량 세제, 신경제 정책을 시행했으며, 전국을 전기화하는 계획과 공업 발전 계획을 제안했다. 스탈린이 10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9,000개의 공장을 짓고 각종 내실 있는 경제 성과를 달성하며 수많은 지식인과 군인들을 배출해 낼 수 있었던 것도 레닌이 그 기반을 다져놓은 덕분이었다. 1941년 파시스트와의 전쟁이 일어났을 때 러시아는 이미 튼튼한 산업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러시아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된 탱크 T34와 전투기 L2, 그리고 로켓 시스템 카추샤를 보유하고 있었다. 러시아.. 2024. 3. 6.
[러시아사]#50_소련의 신경제 정책과 미국인 '아먼드 해머' 신경제 정책의 의의 레닌은 신경제 정책을 통해 러시아의 산업이 국가의 통제를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소비에트 정부는 사유 재산가들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했다. "공장으로 돌아가 10~15년 안에 공장이 다시 일어설 수 있게끔 해주시오." 하지만 자신들의 공장으로 돌아간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 대기업은 정부가 관리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신경제 정책으로 무역은 활기를 되찾았다. 신경제 정책을 시행하는 동안 개인이 운영하는 기업은 무역업의 50퍼센트를 차지했다. 하지만 공업 분야에서는 개인 기업의 비중이 고작 18퍼센트에 그쳤다. 레닌은 자본이나 은행을 착취의 산물이라고 인식했다. 하지만 러시아 내에서의 차용 기업은 허락했다. 미국인 기업가인 해머가 이에 적극 동참했지만, .. 2024. 3. 3.
[러시아사]#49_신경제 정책 이후 미국과 소련의 무역 신경제 정책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사회주의와 시장 경제를 직접 연결함으로써 농민의 적극성을 끌어내 그들과 함께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농민을 사회주의 경제와 결합할 수 있도록 상업을 발전해야만 했다. 상업 분야에 있어 신경제 정책이 가장 먼저 시행했던 것은 공산품을 농산물과 맞바꾸는 물물 교환이었다. 하지만 화폐를 통해 거래하는 방식에 익숙했던 러시아의 아낙들은 물물 교환을 하지 않으려 했다. 게다가 공산품이 도달하는 시간은 항상 늦었다. 그러자 레닌은 국내의 자유 무역과 은행 시스템을 회복하고 국영 백화점을 설립할 것을 선포했다. 모스크바 붉은 광장 한편에 자리 잡고 있으며 오늘날 러시아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쇼핑 명소가 된 이 국영 백화점은 1921년 영업을 시작했다. 러.. 2024. 3. 3.
[러시아사]#48_크론시타트 반란과 신경제 정책 1920년, 볼셰비키 정권이 백군을 물리침으로써 러시아의 내전은 종결됐다. 전쟁이 끝나자 러시아인들은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가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고 싶었다. 하지만 평화롭던 일상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견디기 힘든 시련인 것처럼 전쟁에서 다시 평화로운 상태로 돌아가는 일 또한 쉽지 않았다. 전쟁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전쟁은 사람들의 생각과 사상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전쟁이 일어나던 순간부터 모든 것은 전쟁 위주로 돌아갔고 승리 후에는 다음 전쟁을 준비해야 했다. 이렇게 굳어진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이후 소비에트 연방의 발전 과정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크론시타트 반란 크론시타트 반란 내전이 끝난 뒤 1921년 3월 크론시타트 해군 기지에서 해병들이 일으킨 반정부 반란 사건이다. 발.. 2024. 3. 2.
[러시아사]#47_전시 공산주의와 러시아 내전(적백내전) 사회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전시 공산주의 처칠은 영국의 육군 장관에 재임할 당시 볼셰비키를 요람에서 죽게 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또한 경제학자인 케인스는 러시아의 터진 곳을 메울 수 있는 것은 오직 무력뿐이라고 주장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승전국인 소비에트 연방은 승자의 대우를 받기는커녕 새로운 전쟁에 휘말려야 했다. 자본주의 국가들이 러시아를 공격해 왔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영국, 프랑스, 일본, 미국 등의 국가는 러시아에 무장간섭을 시작했고, 콜차크, 데니킨, 유데니치를 중심으로 하는 백군(반 볼셰비키군)은 신정권을 공격해 왔다. 이에 따라 러시아 전역은 불길과 연기로 뒤덮였으며, 적군이 많을 때는 동시에 24곳에서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다급한 상황에 비해 러시아의.. 2024. 3. 2.
[러시아사]#46_10월 혁명 이후 러시아의 행보, 레닌과 마르크스 주의 10월 혁명 이후의 행보 러시아의 민족들이 10월 혁명 이후 5년이나 고난의 투쟁을 하며 선진 공업 국가의 침략과 간섭을 온몸으로 막아내야 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결국 승리할 수 있도록 뒷받침한 것은 평등과 정의, 그리고 진보적인 사회 제도에 대한 갈망이었다. 10월 혁명으로 인해 러시아의 정권은 소비에트로, 평화와 토지는 국민들에게로 돌아갔다. 혁명 이틀째, 소비에트는 첫 번째 법령인 평화 법령을 공포했다. 이 법령을 통해 교전 중인 국가에 평화 협정을 제안하면서 영토 할양과 배상을 하지 않는 방안을 함께 제안했다. 두 번째로 공포한 것은 토지에 관한 법령이었다. 소비에트 정권은 토지에 대한 국민의 요구를 만족하기 위해 노동량과 소비량에 맞추어 노동자에게 토지를 지급했다. 러시아.. 2024. 3.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