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251 [영국]#18_대작가 셰익스피어의 탄생과 엘리자베스 1세 대작가 셰익스피어의 탄생 엘리자베스 여왕의 통치 리더십은 문화 예술 분야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특히 그녀는 연극에 대해 아낌없이 지원함으로써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같은 위대한 작가가 활동할 공간을 넓혀 주었다. 엘리자베스 여왕 이전에는 서적 및 연극에 대한 검열제도가 아주 엄격하게 시행되었다. 17세기 중반까지 존속했던 성실재판소는 언론, 출판을 통제하는 수단이었다. 이곳에서 단죄받으면 참수형에서부터 사지를 찢거나 내장을 파내는 등의 잔혹한 형벌로 다스려졌다. 토머스 모어 경도 여기에서 재판받고 처형당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시대에는 이런 잔혹한 처벌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성실재판소 과거 영국 왕실에서 정규 재판을 보완한다는 미명 아래 주로 정적을 탄압하기 위해 열던 형사재판소. 웨스트민스터 궁.. 2024. 7. 3. [영국]#17_혼담을 전략적으로 이용한 정치가 엘리자베스 1세 엘리자베스 1세, 혼담도 하나의 전략 엘리자베스 1세가 평생 독신으로 지낸 데에는 앞선 여러 소문도 있지만, 정치적인 이유가 가장 크다 할 수 있다. 그녀에게 결혼은 가장 큰 이득을 얻어낼 수 있는 일종의 수단인 셈이었다. 즉위 후 20여 년 동안 엘리자베스에게는 수많은 구혼자가 줄을 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결혼을 국익을 위한 외교정책의 일환으로 볼뿐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미혼이라는 조건을 이용해 유럽 각국의 쟁쟁한 구혼자들을 경쟁시킴으로써 그녀 자신과 잉글랜드를 적대시하는 유럽 내 적들을 차례로 무장 해제시켰다. 이렇게 얻어낸 정치적인 실리와 두둑한 예물이 잉글랜드의 안전과 그녀의 지위를 보장해 준 것이다.엘리자베스 결혼 전략, 득 엘리자베스가 여왕으로 등극할 당시, 그녀는 꽃다운 스물다섯이었다... 2024. 7. 2. [영국]#16_엘리자베스 1세 즉위하다 엘리자베스 1세 엘리자베스의 유년 시절은 이복언니였던 메리 여왕과 마찬가지로 불행했다. 아버지는 그녀에게 전혀 관심을 주지 않았고, 어머니는 런던탑에 유배되었다가 처형당했다. 이 때문에 그녀는 몸에 맞는 옷조차 제대로 없을 정도로 소외된 성장기를 보내야 했다. 엘리자베스가 21세가 되던 해에 가톨릭교도였던 '피의 메리'는 신교를 신봉한다는 이유로 그녀를 런던탑에 가두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어머니가 죽음을 맞이한 그곳에서 비바람이 치는 밤, 두려움에 몸서리치며 밤새 숨죽여 울기도 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1세(1553~1603)로 왕위에 오른 후, 그녀는 어떤 경우에도 언니 메리처럼 포악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치를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지혜와 관용을 보여줌으로써 시공을 초월하여 현대 정치 .. 2024. 7. 2. [영국]#15_종교개혁 이후 1558년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되다 헨리 8세와 영국의 종교개혁 헨리 8세의 교황의 허가 없는 이혼에 대한 보복으로 교황은 헨리 8세를 파문해 버린다. 어제의 동지가 하루아침에 적이 되어버린 상황이 되었다. 헨리 8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내친김에 국왕이 곧 영국국교회(성공회의 모체)의 최고 수장이라는 수장령을 선포했다. 다분히 희극적이지만, 영국의 종교개혁은 이렇듯 국왕이 이혼 문제로 교권에 도전함으로써 촉발되었다. 이는 마치 삼류작가가 쓴 연애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로, 하나님과 성서의 신성한 소명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의 모양새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 우스꽝스러운 종교개혁으로 인해 무고한 희생자가 생겨났다. 그가 바로 '유토피아'를 저술한 토머스 모어였다. 모어는 헨리가 로마 교회와 결별하고 국교회의 최고 수장 자리에 오르는 데 반대 .. 2024. 6. 27. 이전 1 ··· 11 12 13 14 15 16 17 ··· 63 다음